김철수 거제신문 서울지사장
김철수 거제신문 서울지사장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된지 일년 반이 지났다. 거리두기와 예방주사를 맞긴 하지만 변이종의 창궐 등으로 모두가 불안해한다.

사람들은 대유행 이후의 삶이 이전과 같지 않을 것으로 본다. 산업과 사회의 구조도 많이 바뀌었고 일상의 감각과 사고 패턴도 바꼈다는 뜻이다. 우선 크고 작은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자영업의 타격이 가장 두드러지게 들어났다.

이런 와중에 상대적으로 호황을 누리는 업종도 있다. 배달업·열대 관엽식물을 파는 꽃집이다. 배달업은 비대면 국면에서 생필품을 사고, 음식을 시켜먹기 때문이다.

관엽식물 가게는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공간을 변신시켜줄 식물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늘어난 때문이다. 아파트나 집안에서 서성이며, 화분에 심은 초록 식물이라도 봐야 숨통이 트일 것 같은 일상의 연속이다.

코로나 사태가 아니었으면 동거하는 식물의 존재가치를 절감할 수 있었을까? 초록색은 참 신기한 색깔이다. 다른 색깔과 어울리지 않게 도드라지는 것 같으면서도, 자신이 우점(優占) 색이 돼 다른 빛깔들을 너그럽게 포용한다. 한 점의 초록빛은 눈에 확 띄기도 하지만, 풍요로운 녹음은 안정적인 배경색이 되기도 한다.

식물을 갈구하는 인간의 무의식은 실내녹지를 일컫는 '어번정글'이나 식물인테리어를 한다는 뜻의 '플랜테리아'의 유행에서도 엿보인다. 이제는 '반려식물'이라는 말도 낯설지 않다.

식물은 팬데믹과 더불어 인간의 공간으로 재진입해 동거하면서 주거의 개념을 생각해 보게 한다. 주거권에 대한 주장들은 집에 대한 권리란 그저 비바람을 피할 곳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공간으로 배려 받을 권리라고 한다. 주거권을 포함한 삶의 권리 일반은 많은 경우 타자(他者)와 공존할 권리다. 식물과 동거(공존)는 어떻게 사람의 주거권과 연동될까.

사람들은 흔히 "나는 식물과 맞지 않아, 선인장도 못키우고 죽인다니까"라고 말한다. 죽은 식물들은 안타깝지만 선인장이 주거공간에서 제일 기르기 힘든 식물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면 위안이 될 것이다. 하루 종일 강한 햇볕을 쬐어야 웃자라지 않고 잘 자랄 수 있는데, 그렇게 햇볕이 잘 들어오는 집이 드문 편이다.

많은 사람들이 햇볕이 잘 드는 집을 선호하지만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통풍 역시 좋지 않다. 물의 양도 마찬가지다. 식물이 원하는 양보다 많이 주게 되면 화분바닥에 물이 고여 뿌리가 썩는다.  채광과 통풍은 주거 공간의 질을 결정짓는 요소이기도 하다. 두 조건이 좋지 않으면 주거 공간에서는 산식물보다 죽은 식물이 자리 잡게 된다.

주거공간은 몸이 놓이는 곳이 아니라 삶이 이뤄지는 장소다. 이 점에서는 개인의 생활공간만이 아니라 집합적 삶이 이뤄지는 지구라는 공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생태계라는 말은 광합성 활동으로 공기와 영양소의 생산을 담당하는 식물을 맨 먼저 떠올리게 하는데, 인간의 서식 공간 일대에서 식물이 귀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생태계'보다 '사회'라는 이름이 적절할 공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죽은 식물과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현재의 팬데믹은 코로나가 점령했지만, 인간들에게 최초로 팬데믹 했던 것은 식물이 참여해 구성하는 공기였다.

공기는 식물이 아낌없이 내놓는 산소가 함유된, 지구상 생명의 원초적 공동체를 이루는 피다. 그 공동체에 참여하는 기초활동인 호흡이 마스크 없이는 위험해진 현재, 서로의 호흡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지불식간에 숨을 주고받았던 시절은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생활 영역의 곳곳에 재등장한 식물들은 살기위해 분투하며, 자신이 지상에 처음 등장한 이래 10억년에 걸쳐서 해온 일을 묵묵히 계속한다. 호흡을 마스크 없이 공유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리워하는 우리는 초록빛 식물이 심겨진 화분을 삶의 공간으로 초대해 동거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그 공통성의 영역을 재구축한다. 다시 마스크를 벗을 때 사정없이 밀려들 흙냄새와 풀냄새·꽃향기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삶의 회복이 가능할지 상상하게 해주는 영감의 원천이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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