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호/창신대학문예창작과 교수

문헌에 나타난 거제에 관한 기록들은 대부분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 나타난 기록들이다.

이 가운데 특히 유배(流配)와 관련된 기록들도 많다. 당시의 유배지로는 거제도 외에도 함경도 지방을 비롯하여 제주도, 남해, 진도, 완도 등이 대표적인 곳이었는데, 이 지역들은 왕궁으로부터 떨어진 변방 내지 도서지방인 점이 특징적이다.

이들 가운데 특히 주로 정치적 이유 외 그밖의 이런저런 이유로 유배된 사람들은 대부분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그들이 유배지에서 고통스런 삶을 살면서 남긴 유배문학, 특히 거제의 유배문학은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거제시지에 나타난 몇몇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록들에서만 보더라도 거제도에 유배온 사람들로는 고려시대 인물들로는 의종왕 외 5명(부여공(夫餘公) 수, 승통(僧統) 정, 왕수, 정서, 김문귀 등)을 들 수 있고, 조선시대 인물들로는 송시열 외 100여명의 이름들을 찾아볼 수 있다.

거제는 고려·조선시대에는 왜구의 잦은 침입 그리고 정치적 유형지로서의 이미지 등으로 동시대인들에게는 살기좋은 고장이란 이미지를 주지 못했을 것은 분명하다. 고려시대 문인이었던 이규보의 글에도 그러한 일면이 드러난다.

하지만 고려·조선시대와는 달리 그 이전의 신라시대 때는 그 이미지가 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신라 문무왕 때 거제에 처음으로 상군(裳郡)이란 지명을 부여했다.

여러가지 다른 해석이 있기도 하지만, 거제의 지명(地名)을 ‘여성의 치마’처럼 생긴 거제의 모양에서 유추했을 법한 ‘치마 상(裳)’자를 지명에 넣었다는 사실이 매우 이채롭다.

여성의 치마 모양으로 생긴, 따라서 모성적인 포용의 이미지가 물씬 묻어나는 지명을 얻었던 것이다. 그후 신라 경덕왕 때 지금의 지명인 거제(巨濟)라는 지명으로 개명되었다고 옛 문헌에서는 밝히고 있다.

그러면 ‘거제(巨濟)’란 지명에서 유추되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인 ‘무엇인가를 크게 구한다’는 것은 어디서 연상을 얻어와야 할 것인가.

지명이야 오래된 지명이지만 가까운 시대로는 6·25 전란시 거제의 상황이나 현재의 해양한국의 메카로 부상하는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반도 지도 전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여 거제시의 모양을 가만히 놓고 보면 먼 대양(大洋)을 향해 강력히 돌진해 나가는 문어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다.

바다의 문어 이미지는 고전문학 속에서도 드러나듯 강한 남성적 이미지이다. 문어의 형상은 조선해양 강국의 꿈을 키워온 현재의 거제 모습에 오버랩되면서 거제의 이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거제의 형상에서 과거와 현재가 치마 형상으로 상징되는 여성적 이미지와 문어 형상의 남성적 이미지를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동일한 자연물을 두고 그 형상을 어떤 모습으로 보느냐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의 반영이자 시대상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거제는 평화로운 섬의 여성적 이미지에서 유배지로서의 한(恨)의 이미지로, 나아가 해양강국의 꿈을 이루어 나가는 강한 남성적 이미지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고 보고 싶다.

지금, 여기 거제에서 인연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과거와 현재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부드러움과 강함, 여성적 이미지와 남성적 이미지가 어우러질 때 우리 모두가 희망하는 삶, 미래에 도달하고 싶은 삶의 모습 진정한 참모습이 드러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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