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영 시인
김무영 시인

벌써 한국동란이 일어난지도 71년이 흘렀다. 당시 전쟁 통에 피난을 택한 사람들 대부분이 생을 마감하거나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이 처참한 전쟁을 누가 또 기억하겠는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이 전쟁이 더 아픈 역사로 남는 것은 동족상잔이라는데 있다. 같은 말과 글을 쓰고, 문화도 같은 한민족이 이념의 대결에 선 것이다.

3년 동안 지속된 전쟁 동안 잊지 못할 일들이 많다. 흥남철수작전을 이룬 장진호전투, 인천상륙작전, 최후의 보류였던 낙동강방어선인 다부동전투를 비롯해 크고 작은 전투가 이뤄졌다. 하지만 비전투의 일로 손꼽는다면 거제도포로수용소 설치일 것이다.

6.25가 발생하자 UN군에 납치된 북한군과 중공군 등 17만3000명이나 되는 포로를 수용할 곳을 찾게 된다. 이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대비해 육지와 단절된 섬 지역이어야 하고 식수가 원활해야 하며, 다량의 식량공급이 가능해야 했다. 숙소를 급조할 수 없기에 동절기에도 천막생활이 가능한 온난한 지역인 거제와 남해를 최종 후보에 두고 심의를 했다. 당연히 거제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이 부족한 남해와는 달리 통영에까지 물을 공급하는 거제는 이들을 수용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식수를 제공할 수 있는 소류지를 만들고 일부 마을은 소개하는 등 옛 신현지역(고현·장평·상문·수월)의 전답 등에 터를 고르고 천막촌을 만든다. 일부 초소나 통신대·창고·지휘관 막사 등은 돌과 시멘트로 건물을 짓기도 했다. 독봉산을 사이에 두고 포로들을 수용한 거대한 천막촌에서 우려했던 반란이 일어났다. 반공과 친공 세력으로 나뉘어 밤이 되면 또 하나의 전쟁터가 됐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수용소 내의 반공청년회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직접 공산주의를 경험한 자들로 공산주의 이념 자체가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공산주의의 실체를 알리는데 혼신을 다했다.

포로로 반공단체에 있었던 자가 수용소가 해제되고 전쟁이 끝났지만 바람소리에도 후한이 두려워 잠을 설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수용소는 해제되고 포로들은 남한에 남든가 북한으로 가든가 했다. 반공청년단체 소속 포로였던 이들이 공산주의의 실체를 알리고 민주주의를 주지시키는 노력을 다했음에도 그 헌신적 노력은 사라지고 있다.

이들의 이름과 활동내역을 담은 표지석은 왜 세우지 못했을까! 그들이 친공 세력에 쫓기면서도 외쳤던 민주주의 그 절규의 노래가 들리지 않는가. 그렇게 했더라면 반공청년회의 자손이 대대로 거제도포로수용소를 찾게 되고 자긍심을 고취시킬 것이다.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반공 포로들의 한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줄 것이다.

또 특별법을 제정해 이들에게 보상하는 방법도 강구해야 할 일이다. 이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포로수용소는 옛 신현지역뿐만 아니라 저구·명사, 그리고 추봉도 등 한산도 지역까지 펼쳐져 있다. 이곳의 유적지도 발굴해 포로수용소유적지 범주로 개발하고 발굴해나갈 필요가 있다. 여기에 포로수용의 흔적이 있는 곳은 발굴해 보존하는 노력도 함께 기우려 나가야 한다.

또 포로수용소 주변 천막 등을 이용해 장이 서고, 주막집과 댄서장이 만들어져 운영됐던 일이며, 수용소 관련 문화나 에피소드를 발굴해 수용소 문화축제를 열어 전쟁의 아픈 역사를 세계인에 주지시키는 일도 필요하다. 청소년들에게 포로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4박5일 정도로 잡아 1·2박은 포로체험, 3일 정도는 세계 최고의 조선산업과 빼어난 거제 해안을 관람하는 것이다. 이 체험은 전국적으로 국비로 시행해 학과에 반영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다시는 지구상에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전쟁의 아픔을 알게 하여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다. 이런 여러 이점을 살려 조선산업과 함께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거제로 만들어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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