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의 성(城)5】 장목면 '장문포왜성(巨濟 長門逋倭城)'
1593년 왜군 제5군 사령관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쌓아
본성은 방치된 채 외성만 道 문화재로 지정

장목면 '장문포왜성'의 외(外)성.
장목면 '장문포왜성'의 외(外)성.

거제시 장목면 장목항의 옛 이름인 장문포는 항구가 좁은 관문이기 때문에 장문포라는 이름이 붙었다. 장문포는 왜적이 부산 가덕도를 지나 진해만을 거쳐 거제바다로 들어오는 요지로 임진왜란 이후에는 장목진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성곽 대부분은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훼손된 상태며 성곽 주변에는 나무와 수풀이 우거져 확실한 구조와 모습을 파악하기가 어려웠으나 수년 전부터 거제시가 수목 제거에 힘쓰면서 성곽의 형태는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본성과 외성을 가르는 임도를 사이에 두고 접근이 쉬운 외(外)성은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73호에 지정돼 있지만 같은 성채이자 외성보다 규모가 큰 본성은 문화재에 등재조차 돼 있지 않은 상태로 알려져 대책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

외성과 달리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장문포왜성의 본성.
외성과 달리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장문포왜성의 본성.

장문포왜성은 누가, 어떻게 쌓았나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130-43번지, 장목항 입구 해발 107m 산봉우리에 만든 장문포왜성은 왜군 제5군 사령관으로 참전한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쌓은 성으로 알려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종사촌 동생으로 알려진 마사노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끼는 휘하 장수의 대명사인 '시즈가타케 칠본창'중 한명이며 1592년에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 제5군 사령관으로 조선분할대관제 통치계획에 따라 충청도를 점령하고 이후 남해안으로 퇴각해 1953년 5월부터 송진포와 장문포에 왜성을 동시에 축성했다.

5군 소속이었던 도다 카스타카가 병으로 죽자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주둔해 장문포왜성을 수성 한 것으로 알려졌다.

울산성곽연구회 왜성 실측연구팀의 '우리땅 왜성의 천수대 본환 실측 연구'에 따르면 장문포왜성은 우리나라에 쌓은 왜성 중 1개의 출정군으로 편성된 시코쿠(四國) 지방의 왜장들이 축성하고 주둔한 왜성으로 본성과 외성에 각각 천수대를 축조한 독특한 공간구조로 설계된 왜성이다.

19세기 장문포왜성이 표기된 고지도.
19세기 장문포왜성이 표기된 고지도.

왜군 7430명이 성을 쌓고 주둔했다고 전하는 장문포왜성의 본성과 외성은 연곽식성체로 만들어졌다. 본성은 북서쪽과 남동방향으로 능선을 따라 성곽을 축조하고 동쪽 선창 방향 등성이에 여러 단계의 야구라(櫓(노)·성곽 모서리에 만든 망루 및 무기창고)를 만들어 놨으며 내부 방어를 위해 출입통제를 위한 별도의 장치를 만든 흔적이 있다. 

장문포왜성의 본성은 19개의 변으로 만들어졌으며 천수대(天守台)는 남쪽 방향으로 다몬야구라(多聞櫓(다문노)·성벽을 따라 지은 긴 단층집, 무기고 및 병사의 주둔용)가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울산성곽연구회 왜성 실측연구팀이 조사한 장문포왜성의 둘레는 천수대 체성의 길이까지 264.9m이며 외성의 둘레는 164.4m다. 이는 지난 1995년 동아대학교 박물관 팀이 조사한 장문포왜성의 둘레 710m와 차이가 나는데 이는 장문포왜성의 나머지 잔존 외성을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둘레 710m, 높이와 너비는 3.5m 규모로 지어졌으며, 일부 성벽이 훼손되고 당시 건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왜성의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하게 보존돼 있다.

장문포왜성의 성곽과 내부 다몬야구라의 축조 상태는 오랜 보존 기간을 감안해도 다른 지역의 왜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허술하게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장문포진이 위치한 곳이 조명연합군 등의 공성전을 대비한 성이 아니라 거제와 전라도로 향하는 뱃길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성곽이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장문포왜성을 둘러보면 성곽 곳곳에서 기와 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왜군의 수장이 머무른 천수대 부근에는 다른 곳보다 많은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기도 한다.

일제 강점기 일본이 제작한 장문포왜성 약도
일제 강점기 일본이 제작한 장문포왜성 약도

조선의 명장들도 뚫지 못한 난공불락의 요새 장문포왜성

장문포 해전은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였던 옥포해전이나 일본군의 전의를 상실케 했던 견내량 해전(한산대첩)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전투지만 전투는 성과가 아닌 임진왜란 전투사 측면에서 보면 전설 혹은 기념비적인 전투다.

조선군과 일본군 최고의 명장이 한자리에 모인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이자 조선의 수륙군 양동작전이 펼쳐진 무대기 때문이다. 장문포해전에 참가한 장수의 이름을 나열해보면 통제사 이순신·홍의장군으로 이름을 떨친 육병장 곽재우·충용장 김덕령이 출전했고 행주대첩의 권율이 지원군으로 등장한다. 이에 맞서는 일본군은 제2진 사령관인 가토 기요마사·노량해전의 지휘관 시마즈 요시히로·제5진 사령관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수성하고 있었다.

장문포 해전이 조명받지 못한 이유는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 치른 9차례(17회)의 크고 작은 해전 중 가장 성과가 미미한 전투라는 점과 육지전투에서 불패신화를 이룬 홍의장군 곽재우가 승리하지 못한 유일한 전투여서다.

이는 당시 일본군은 앞서 벌어진 이순신과의 해전에서 경험한 전력 차이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순신과 바다에서 싸우지 말라는 명령 때문에 방어에 집중했기 때문으로 조선군은 장문포 앞바다와 영등포로 이동해 수차례 싸움을 걸었으나 일본군은 성에 꼭꼭 숨어 응하지 않고 싸움을 피하기만 한 것으로 알려졌다.

곽재우와 김덕령도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육지로 상륙해 조선 수군의 함포사격을 지원받아 장문포왜성에 접근했으나 조총으로 무장하고 수성하는 왜군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장문포 해전의 시발은 당시 도체찰사 겸 좌의정 윤두수가 원균에게 건의받아 독단적으로 전투명령을 내리면서부터다.

더구나 이 사실을 알게된 영의정 유성룡이 선조(宣祖)의 허락을 받아 작전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명령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전투가 진행됐고, 그 결과 별다른 성과없이 고작 정박중인 왜선 2척을 부수는 성과를 올리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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