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등면 '견내량왜성']
칠천량해전 이후 왜군의 해상권 장악 및 보급로 확보 위한 주둔지
우리나라에 남은 왜성 중 유일한 토성에도 불구 훼손 심각한 상태

지난 2019년 진행된 유적 표본조사 현장.
지난 2019년 진행된 유적 표본조사 현장.

왜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왜군이 조선을 침공하면서 근거지와 보급로를 확보하고 연락망 및 조선군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우리의 선조들을 동원해 만들어진 유적이다.

거제지역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에 쌓은 성이 모두 존재하는데 송진포왜성·장문포왜성·영등왜성은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 이후, 견내량왜성은 정유재란이 발발한 1597년 이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기록에 전해지고 유적에 의해 증명된다는 점에서 왜성은 단순한 외침의 흔적이 아니라 외침으로 인한 아픈 기억과 실상을 되새길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지만 거제지역 왜성의 훼손은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특히 국내에 남아있는 왜성 30여개중 거의 유일하게 토성으로만 지어진 견내량왜성은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성곽의 모습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다 해방 이후 왜성 부지가 해군에게 관리되고 해군이 마을주민에게 땅을 대여하면서 급속도로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견내량왜성은 지난 2019년부터 왜성 서남쪽 내성 구조 위에 글램핑장이 만들어지면서 그나마 육안으로 확인됐던 일부 내성의 윤곽과 해자의 흔적이 사라진 상태다. 지금은 천수각 터와 외부 성곽 등 4분의3 정도만 남아 있다. 견내량왜성과 같이 각종 개발로 성곽 자체가 없어지거나 지형이 바뀌는 등 왜성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가늠하기 힘들어지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견내량왜성이 원형을 알아볼 수 없게 된 배경에는 문화재 보호·관리·홍보에 소홀했던 지역사회의 책임도 따른다. 유적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고 흙더미로 취급하고, 왜성을 침략의 잔재로만 여겨 홀대한 탓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견내량왜성이 존재했다는 안내판이라도 만들어 외침의 아픈 기억과 실상을 되새길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만드는 일이 시급해 보인다.

경남의 성지' 자료집에 기록돼 있는 거제 왜성. 빨간색 동그라미가 사등 견내량왜성이다(사진 왼쪽). 견내량 고지도.
경남의 성지' 자료집에 기록돼 있는 거제 왜성. 빨간색 동그라미가 사등 견내량왜성이다(사진 왼쪽). 견내량 고지도.

견내량 왜성은 누가 만들었나 

둘레 350m의 토성(土城)을 쌓아 견내량(見乃梁)목을 감시하던 견내량왜성은 수비장 및 성을 축성한 장수에 대한 기록은 없고, 성을 축성하고 방어한 장수로 '가라시마 세토구치(辛島瀬戸口'와 '소 요시토시'라는 일설이 전해지고 있다.

가라시마 세토구치라는 장수가 임진왜란에 참전했다는 기록은 찾기 힘들지만 '소 요시토시'는 대마도주 정종성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출전한 기록이 있다. 특히 소 요시토시는 임진왜란 발발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훗날 조선통신사 등 왜와 조선의 외교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1진 사령관 및 총사령관·정유재란 2군 사령관을 맡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장인으로, 장인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왜군이 조선의 수군을 제어하기 위해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거제도에 성을 축성해 조선의 수군에 대한 수비를 견고하게 하라고 지시한 기록이 있어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견내량에 머무르면서 토성(土城)으로 축성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견내량왜성의 2019년 드론사진(사진 왼쪽)과 1940년대의 견내량 측량도.
견내량왜성의 2019년 드론사진(사진 왼쪽)과 1940년대의 견내량 측량도.

견내량왜성은 왜 만들었나

견내량왜성은 '광리왜성' 또는 '왜성동성(倭城洞城)'으로 불리기도 한다.

1745년부터 1765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비변사인방안지도', 1750년대 초반에 제작된 '해동지도', 1800년 이전에 만들어진 '광여도'에는 송진포왜성·장문포왜성·견내량왜성 표기가 있다. 하지만 1872년 만들어진 지방도 및 '장목포진지도'에는 송진포왜성과 함께 견내량왜성의 표기가 사라졌고, 견내량왜성이 있던 자리에 '왜성리'라는 마을이 표기돼 있는 것으로 미뤄볼 때 이 시기쯤부터 견내량왜성은 온전한 형태가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899년(광무3)에 만든 거제군읍지(巨濟郡邑誌)에는 사등면 15방중 왜성마을과 광리마을이 각자 다른 마을로 구분돼 있고 1931년 11월 진해요새사령부의 검열을 거쳐 일본어로 간행된 경남의 성지(慶南の城址)에는 왜성동성(倭城洞城)으로 기록된 것과 당시 성곽사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뤄 이때까지 견내량왜성의 보존 상태는 양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군이 왜성을 만든 이유는 군수물자의 보급로 확보를 위한 목적과 일본군의 주둔·점령지의 통치를 위해 쌓은 것으로 왜성은 국내의 성곽유적과 비교하면 만든 방법이나 성의 외관상 확연히 차이가 난다.

일제강점기 때의 견내량왜성.
일제강점기 때의 견내량왜성.

국내 성곽은 기울기가 80∼90도 정도로 직각인데 비해, 왜성은 성곽의 기울기가 70도 내외로 우리나라 성보다는 많이 기울어져 있다. 학계에서는 우리나라에 만들어진 왜성이 오랫동안 방치된 이유도 있지만 축성방식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보존이 힘들고 훼손의 가속화 진행이 빠른 것으로 보고 있다. 왜성은 전시 상황에서 만들어져서인지 방어에 유리한 산악지형을 이용한 산성이 많은데 거제지역의 경우 장목면 일대에 만들어진 장문포왜성·송진포왜성·영등왜성 등이 산성으로 만들어졌다.

또 견내량왜성처럼 강과 바다와 가까운 독립된 구릉에 만들어진 경우가 있는데 이는 왜군이 선박을 통한 침략작전을 이용했고 보급이나 연락도 배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견내량왜성에서 해간도가 보이는 앞 바닷가에는 돌을 바닥에 박아 길이 20m 폭 4m가량 크기의 사각형 형태로 만든 선착장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남아 있었다.

견내량왜성은 폭 450~500m의 견내량해협을 사이에 두고 거제도에서 육지인 통영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교통 요지다. 더구나 견내량에서 남쪽으로 6㎞가량만 내려가면 조선 수군 중심이자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이 만들어졌던 한산도가 있다.

견내량왜성은 칠천량해전 이후 왜군이 남해안의 내해(內海)를 거쳐 전라도 지역으로 가는 교두보 역할은 물론 거제지역과 부산·진해 지역에 만든 왜성들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또 견내량해협을 통과하는 조선 수군을 경계하기 위해 세운 초소 역할은 물론 군수물자의 보급로 확보를 위한 왜군의 주둔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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