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김계수 칼럼위원

누구나 가슴에 꽃 한 송이 품고 살아간다. 가지의 살갗을 찢어 꽃잎을 올리는 일은 바람과 햇살과 땅의 일, 피어난 꽃송이를 감상하는 일이 단지 내가 하는 일이다. 그렇게 피어난 꽃을 바라보고, 꽃 소식을 아는 사람에게 사진으로 보내고, 가끔 꽃집 앞에서 발걸음 멈추어 꽃에 대한 예를 갖추는 일도 내가 하는 일이다. 꽃잎에 바짝 다가가 제 향기를 일일이 알려주는 예의쯤은 갖추고 살아가야지. 아름다운 표현까지는 바라지도 말라, 그건 유능하고 오래된 시인이 하는 일, 난 그저 꽃피어 한껏 부풀어진 봄을 읽는 독자로 만족한다.

요즘은 한 계절을 온전히 읽어 내기도 쉽지 않다. 우수 경칩에 대동강 물이 풀린다지만 절기 따라 딱딱 맞춰 풀리는 일이 들쑥날쑥이다. 2월 초에 갑자기 날씨가 따뜻해져 절기 잃은 개구리가 먼저 땅을 찾았다가 추위에 혼이 나는 경우를 보았다. 이런저런 일로 세상이 혼란스러워도 봄이 오기 마련이겠지만 이런 경우는 심각한 난독증세를 보인다. 아지랑이 같은 어지러움으로 더 읽을 수가 없어 봄을 덮어버리는 수가 있다.

봄이 온다는 것은 새롭게 살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얻는 것과 같다. 배고픔도 잊고 쪼그려 앉아 괭이밥풀꽃과 노루귀꽃을 읽고, 먼 곳 소녀가 생각나는 바람꽃을 읽고, 사라져가는 제비가 생각나는 남산제비꽃을 보고, 또 개별꽃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나는 노란 배추꽃을 읽을 때는 얼마나 목이 메이든지….

내가 자주 봄을 펼쳐서 읽고 다시 읽어 봄 기온이 하얀 솜구름처럼 부풀어지도록 하는 것은 무거운 겨울 기운을 벗기 위함이다. 언제나 봄 한 권을 다 읽어 내지는 못하지만, 올해는 봄의 아름다운 목차라도 꼼꼼히 살피고 건너 볼 생각이다.

얼음이 풀린 산들에 나가 맨손으로 마른 풀 걷어내면 거푸집 아래 봄의 목차들 빼곡하다. 언제 저 많은 목차를 살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개울가 맑은 수면을 마른 갈댓잎으로 훅 불어내면 얼었던 강바닥이나 물속 바위에 새겨진 문장들이 빼곡하다. 물벌레나 다슬기들이 부지런히 봄을 기록한 흔적들이다.

봄을 읽지 않을 때는 반드시 다시 덮어둬야 한다. 양지바른 모퉁이에 쌓인 낙엽들을 걷어내거나 겨우내 닫혔던 창문을 열면 낙엽 속이나 창틈에 겨울을 이겨낸 무당벌레를 발견하면 참 난감하기 때문이다. 아직 날개를 펼칠 힘을 얻지 못했으니 조심해야 한다. 경작에 급한 일이 아니면 땅을 함부로 파서도 안 된다. 하루나 이틀 더 늦추어 땅을 일구되 겉흙부터 조심스럽게 파헤쳐야 개구리 등을 다치지 않게 한다.

이런 경우는 봄을 읽는 속도가 떨어진다. 흙을 조금만 걷어내면 얼어붙은 땅속에서 봄 한 권을 출판일에 맞춰 엮느라 어찌나 수고로웠는지 봄의 목차마다 봄의 행간마다 멈칫멈칫 솟아오른 발목들이 노랗게 부었다. 날씨처럼 붓기가 풀리면 곧 푸른 제 색을 찾게 될 것이다. 봄이 되면 바람도 변성기가 온다. 솔가지를 독하게 휘감아 불어대던 바람도 성깔이 죽고 부드러워진다. 봄바람은 소리도 없이 땅으로 들녘으로 가슴과 가슴으로 살짝 와 닿는다. 큰 강이나 저수지를 걸으면 추위에 망설인 애달픔 사이사이 부드러운 낭송이 시작된다.

독선이나 욕망, 적개심, 잔혹함, 부정부패, 빼앗음, 새치기, 사건 사고 이런 단어들이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가 있을까 경외스럽다. 갈등과 사건 사고가 없으면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인기 소설에 비하자면 참 재미없게 느낄 수도 있겠으나, 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된다. 멀리 있는 희망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있는 희망을 보여준다. 봄은 성급하고 너무 욕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온전히 읽히지 않는 동화 같은 책이다. 함부로 땅 위를 빠르게 걸었으니 작고 귀여운 봄의 글씨들이 보였을 리 없다.

봄보다 먼저 찾아온 꽃들이 온통 환하다. 이리 험난한 세상에 자꾸 꽃을 피워대는 것에야 무슨 이유가 필요하리. 꽃 소식을 아는 사람에게 전할 수 있음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온전한 봄 한 권 가져다주는 것은 바람과 햇살의 일, 수고로운 땅의 일, 나는 마른 억새풀처럼 바로 서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천천히 즐기리라, 꽃 피는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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