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다크투어리즘 5]거제현 치소 고현성∼오늘의 거제 기성관까지

임진왜란으로 거제읍성이 함락되자 치소를 거제면으로 옮겼다. 치소가 옮겨오면서 거제향교 역시 거제면으로 옮겨왔다. 사진은 거제 치소와 거제향교 등이 옮겨앉은 현재의 거제면.

임진왜란으로 함락된 거제읍성(고현성)이 이동한 경로를 따라 다크투어를 떠났다. 발걸음을 향한 곳은 고현동 고현성∼거제면 거제향교∼기성관∼반곡서원 등이다.

#거제읍성, 남해안 수군 진영의 요새지

거제시청과 거제시의회 등을 감싸고 있는 고현성을 찾았다.

거제읍성(고현성)이 있었던 고현동은 1432년부터 1664년까지 거제현의 읍치였다. 고현성(古縣城) 일대는 신라시대 '고정부곡'으로 불리다가 부곡이 폐지된 후에는 '고정리(古丁里)'로 지명이 바꼈다. 1432년 거제현의 치소가 옮겨오고 본격적인 고현성 축조가 끝난 이후부터 '고현(古縣)'이라는 현재 지명을 사용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찰사 하연(1376~1453년)의 글에 의하면 대마도 정벌이 끝난 다음 1419년(세종 1년) 거창군에 있던 거제현을 거제도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거창 진주에 있는 거제현민을 8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주시켰다. 

1432년(세종 14년) 사등성에서 고현으로 치소를 옮겼고, 1449년 현령 이호성이 부임해 1451년 가을부터 1453년까지 관사와 창고·곳간 등 고현성을 건설했다. 1453년에 끝난 고현성 축조에 '황취루(黃翠樓)' 누각이 객관과 마주하며 북쪽에 위치했고, 고현성 서문 북쪽 편에 '거제향교'가 있었다.

고현성의 축성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이 달에 경상도 거제현성을 쌓았다. 겸지병조사 김순우를 경상도에 보내 거제성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등으로 기록돼 있다. 

이것으로 볼 때 고현성은 1451년(문종 원년)∼1453년(단종 원년) 사이에 축성됐던 것으로 보인다. 성곽의 형태·구조는 계룡산 기슭의 동쪽으로 뻗은 설상대지 위에 평면이 배 모양으로 축조된 석축성으로 삼문(三門) 옹성(甕城·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친 성문을 방어하는 작은 성)과 치(雉·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와 해자(垓字·성 밖으로 둘러 판 못)를 구비한 전형적인 조선 전기의 읍성구조를 갖추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함락된 뒤 1663년(현종 4년)에 거제면으로 치소를 옮긴 다음 곧 폐허가 됐다. 6.25전쟁 때 UN군 포로수용소가 이곳에 설치되면서 파괴는 극에 달했다. 현재 성벽은 길이가 818m인데 평균 높이 2m·너비는 5.5m 가량이 남아 있다. 

축조수법은 외벽은 구릉사면을 'ㄴ'자 형으로 절개하고 그 생토 층에 자갈을 깔아 다진 다음, 장대석을 일렬로 배치해 기단석으로 삼고 그 위에 성 돌을 쌓았다. 내벽은 지표면을 50∼60㎝로 파서 그 속에 할석을 채워 기단부를 보강하고 그 위에 사람머리만한 할석으로 쌓아 올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3038척·높이가 13척이라고 기록했다. 크기는 남해안의 읍성 가운데 중간 정도에 해당되며 높이는 큰 편에 속한다. 이 성은 1991년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됐고, 1991년에 그 보고서가 간행됐다.

거제시민공원을 품고 있어 시민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는 고현성 모습.
거제시민공원을 품고 있어 시민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는 고현성 모습.

#6.25전쟁 때 UN군 포로수용소 설치

거제읍성(고현성)은 거제시청 인근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터다. 이 성은 1423년(세종 5년) 당시 관아가 있던 사등성(沙等城)이 좁고 물이 모자라 새로 읍성 터를 찾아 경상도민 2만여명을 동원해 9년간에 걸쳐 쌓은 성이다. 둘레가 2㎞·높이 7m나 되는 이 성은 동·서·남의 세 방향에 성문이 있었다. 성 둘레에는 해자를 두른 조선시대 전기의 대표적인 축성방식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평지읍성이다.

1432년(세종 14년) 성안에 40여칸의 건물을 지어 사등성에 있던 관아를 이곳으로 옮겨 읍성을 삼고, 적의 침입 때 인근의 주민이 들어와 지키도록 했던 곳이다. 

1592년(선조 25년) 5월 일본군에 의해 함락된 때도 있었으나 남해안의 수군 진영에 이웃한 요새지였다. 1663년(현종 4년) 관아를 지금의 거제읍으로 이건함에 따라 읍성의 기능을 잃게 됐다. 

거제읍성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거제현(巨濟縣)은 지금의 거창에 해당하는 가조현과 함께 진주목으로 이전했다. 

조선 초기 1422년(세종 4년) 거제현이 복군되면서 신현읍 수월리로 옮겼다가 식수가 부족하고 장소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지금의 사등면 사등리에 해당하는 사등성으로 옮겨진다. 이후 1432년(세종 14년) 지금의 거제시청이 위치한 고정부곡(古丁部曲)에 거제읍성을 축성한다. 이후 1489년(성종 20년) 거제부로 승격됐으나, 임진왜란으로 거제읍성이 무너지고 1664년(현종 5년) 거제현을 현재의 거제면으로 이전하고, 거제읍성을 고현성(古縣城)이라 칭하게 된다.

대지 위에 평면의 배 모양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다. 1013년(현종 4년)까지 거제군의 관아로 사용됐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기록에 따르면, 둘레가 3038척(921m), 높이 13척(4m)이라 했으나,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성벽의 길이는 818m·높이는 2m이다. 

동·서·남의 3곳에 성문을 냈으며, 성문 앞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은 성 하나씩을 쌓았다. 또 성문 위에 낮은 담을 설치하고, 성 둘레에 못을 파서 물이 흐르도록 하는 등 방어시설들을 마련했다. 

이 성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때 왜군에 함락되기도 했으나, 남해안 수군의 진영에 이웃한 요새지로 쓰였다. 그 후 관아를 거제읍으로 이전하면서 읍성의 기능을 잃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UN군에 의해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면서 대부분이 파괴됐고, 현재는 서남쪽 600m 정도만이 옛 모습의 성벽을 유지하고 있다. 고현성은 조선시대 전기 때 사용한 읍성으로 사등성이 좁고 식수가 부족해 고현성으로 옮기게 됐는데, 이때가 1453년(단종 1년)이다. 

고현성에서 차후 거제면으로 거제관아가 옮기게 됐으며, 거제관아가 있었던 곳은 읍성이 없었기에 현재 거제시에서는 고현성이 거제읍성으로 불려지고 있다.

거제읍성(고현성) 축성 당시에 경상남도 육읍(六邑)의 백성 2만여명이 동원됐다는 기록이 있다. 2년 동안 2만명이나 동원됐으니 1년에 1만명의 엄청난 인원을 동원해 만든 읍성이다. 

이 성은 고단한 백성들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난 읍성이다. 경남도지정 기념물 46호로 고현성의 북문지 문루(門樓) 복원공사가 3억5000여만원의 예산으로 지난 2006년 7월 복원됐다. 복원된 문루는 기단을 포함해 높이 5.8m로 넓이는 15평 가량 된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성벽이 보존돼 있었으나 6.25 전쟁을 거치면서 상당부분 훼손돼 현재 600m 정도의 성벽만 남아있다. 

거제시청·거제시의회 등을 안고 있는 거제읍성의 일부는 현재 주로 경작지나 주택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나머지는 거제시에서 시민공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거제읍성의 북문인 계룡루(鷄龍樓)는 본래 누각의 이름은 아니고 복원을 하면서 시민들의 여론조사로 선정된 이름이다.
 
 

거제향교

#조선시대 유림들의 요람 '거제향교'

임진왜란이후 거제면으로 고현읍성이 옮겨지면서 함께 옮겨진 조선시대 공립학교 거제향교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제향교가 정확히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근거자료가 없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향교가 불에 타 설립 상한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경남교육사에서는 임진왜란 전 1432년(세종 14년) 고현의 도론골(현 거제시청소년수련관 뒤편)에 창건한 것으로 돼 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광해군으로 기술하고 있다.

향교의 현판문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고현성이 함락되면서 성 밖에 있던 향교는 불탔기 때문에 향교의 그 이전의 사적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거제군지에는 1664년(현종 5년) 거제현아를 고현에서 거제면(당시 서부면)으로 옮겨올 당시 현령 이동구의 발의로 거제향교가 창건됐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그 이전의 사실을 밝힐 수 없다고 했다. 이후 향교는 1715년 지금의 반곡서원 서편 도론곡에 이건했고, 1855년(철종 6년)에 현재의 위치인 거제면 서정리에 이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전해진다.

1970년 전교 윤병재가 주선해 국고보조로 대성전을 보수하고 단청했다. 이후 전교 반희도가 거액을 희사해 풍화루를 보수했고 전교 원호상의 노력으로 명륜당을 확장·중건했다. 

1670년(현종 11년) 주조한 청동제기·용두향로·주발탕기 등 100여점이 남아 있다. 이 놋쇠제기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의 놋그릇 공출에도 불구하고 유림들의 항거로 보존될 수 있었다. 주조된 지 300여년이 지난 놋쇠제기는 섬세하고 우아한 형태가 문화재급 수준으로 관리·보존의 손길이 필요해 보인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교육을 담당하던 관학교육기관으로 현재 중·고교에 해당하는 교육시설이다. 당시 양반자제들을 대상으로 사서삼경을 비롯해 학령·사목·절목 등을 가르쳤다. 1982년 8월2일 지방 유형문화재 제206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기성관

#기성관과 조선시대 사립학교 반곡서원

거제향교를 나와 거제면사무소 옆을 지나면 느티나무 고목아래 솟을대문이 한 눈에 들어오는 기성관에 들어섰다.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왼편으로 비석들이 늘어섰다. 세월의 무게에 녹이 쓴 철 비석과 마모가 심하여 판독조차 어려운 석비들이다. 관찰사·삼도수군통제사·암행어사·현령·부사 등의 송덕비다. 

기성관은 정면 9칸·측면 3칸으로 가운데 9칸은 2칸 너비로 폭을 넓혔고, 솟을지붕의 3칸의 기둥은 이중 대들보를 높이 올려 안에서 바라보는 천정의 웅장함과 40개의 기둥이 솟은 통 마루청으로 돼 있다. 이중 서까래를 받힌 팔작지붕으로 3등분의 중앙은 솟을지붕으로 크기는 웅장하다. 통영 세병관·진주 촉석루·밀양 영남루와 함께 경남의 4대 목조건축물로 꼽힌다. 

'기성'은 거제의 옛 이름으로 기성관은 거제관아로서 1422년(세종 4년)에 고현에 건립했다. 이후 성종 원년에는 옥포·조라·가배·영등·장목·지세포·율포 등 거제부 7진의 통할영인 군영의 본부였으나 임진왜란으로 고현성이 함락됨에 따라 현종 5년에 성을 폐쇄하고 거제면인 현 위치로 옮겼다.

기성관에서 길을 건너 부속건물인 질청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 건물은 지방관청의 육방을 비롯한 하급관리들이 사무실로 이용하던 건물로 '작청·연청'이라고도 하는데 현종 5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 왔다. 

일제강점기에는 거제현의 관청이 없어지면서 1926년부터 부산지방법원 거제등기소로 사용되었으며 1976년 경남도문화재료 지정되고 1982년 1월에 등기소가 고현으로 옮겨감에 따라 전면해체 복원돼 지금의 모습을 찾게 된 굴곡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건물의 원래 배치는 'ㅁ'자 형이었는데 도시화 과정에서 도로에 닿는 부분이 철거되어 지금은 'ㄷ'자 형으로 27칸이 넘는 건물이다. 양 측면은 주거용 방이고 중앙은 사무를 볼 수 있는 대청마루로 소박함이 묻어나서 잠시 옷깃을 여몄다. 기성관·질청은 있으나 정작 관아인 본청 동헌이 없어 찾았으나 예전에 헐어내 거제면사무소를 지었다고 면사무소 앞에 안내판이 서 있어 아쉬웠다. 

반곡서원

질청을 뒤로 하고 오늘날 사립학교에 해당되는 거제면 반곡서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원은 우암 송시열이 1679년(숙종 5년)거제도로 귀향을 왔을 때 머물렀던 곳에 1704년(숙종 30년) 거제의 유림들에 의해 건립됐다. 유림 윤도원·옥삼헌·김일채·윤명한·허유일·신수오 등이 창건해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을 주벽으로 죽천 김진규·몽와 김창집 선생을 배향으로 봉안하고 있다. 

그 후 1863년(철종 계해)에 단암 민진원·삼호 이중협·계산 김수근을 추배하고 석다례를 일관 봉행하고 있다. 1868년(고종 5년)에 대원군의 서원 폐지령에 의해 본원이 폐철됐다. 1906년(광무 10년)에 서원 옛터에 제단과 비석을 건립하고 매년 가을철에 한 번씩 단제를 봉행했다. 

거제군이 복군된지 18년이 지난 1971년에 거제향교 전교 윤병재가 반곡서원의 복원을 발의해 유림총회의 득찬으로 우암사를 중건하고 고재(古齋)를 보수했다. 

서원을 관리하는 고자실은 도비 보조로 2010년부터 2013년 2월까지 복원사업으로 개축하는 등 옛 모습을 되찾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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