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정 수필가

건너편 저수지는 늘 만수(滿水)다. 물이 흔한 동네라서 농사에 쓰이기보다는 산불 진화하는 소방 헬기의 소화수로서의 역할이 더 막중하다. 빨간 소방 헬기가 수면 가까이까지 내려와 커다란 물주머니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날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우기인 요즘은 든 물 만큼 넘쳐 내보내는 수문만이 제 몫의 일을 하고 있다. 

저수지 뚝 아래 넓은 들은 주거 제한 구역이다. 건축 허가가 날 리 없으니 논과 밭뿐이고 해를 가릴 큰 나무도 없다. 주말이면 민물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저수지 둘레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지만 평소에는 물새들만이 유유히 논다. 

우리는 저녁나절 개를 앞세우고 그 곳으로 산책을 간다. 바람에 찬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지난 초봄. 산책 중에 보니 뚝 아래쪽 열 평 남짓한 터에 자갈을 깔아 다지고 있었다. 며칠 후에는 콘테이너 하우스가 놓여있고 전봇대도 세워졌다. 어느 날 보면 위성안테나가 달려 있고, 듬직한 야외용 탁자가 놓여있다. 빨랫줄을 매어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운동복 바지가 널려 있기도 했다. 농기구나 넣어 둘 농막이라 하기에는 살림의 구색을 갖추고 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콘테이너 하우스의 주인이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부도를 내고 도망을 왔나, 마누라 등쌀에 쫓겨났나, 왜 하필이면 물이 가득 담긴 저수지 뚝 아래에다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자 그는 주변에 배수로를 내고 있었다. 남편이 다가가 '수고하십니다' 인사를 건네니 안 해 보던 일을 하려고 하니 힘이 든다면서도 괭이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남편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남자는 지나가다 말을 붙인 우리에게 거리감을 두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그가 엊그제는 자기도 개를 한 마리 키워야겠다며 먼저 말을 걸어 왔다. 내가 궁금해 한다는 걸 알아차리기나 한 것처럼 기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는 금융기관에서 근무하다 퇴직을 했다고 한다. 자식들 공부도 다 마쳤고, 퇴직할 때 받은 목돈으로 가족 생계 위협을 느낄 형편은 아니라고도 했다. 퇴직하고 집에 들어앉아 있어 보니 마냥 좋고 자유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이웃집 부인이 아내에게 마실을 왔다가도 현관에서 소곤소곤 몇 마디 주고받고는 가버린다. 중년을 넘기는 아내도 남편과 늘 같이 있는 걸 즐거워하는 기색이 아니다. 남편의 눈치를 보며 운신의 폭을 좁혀가는 것 같았다.  

들어앉은 건 나만이 아니고 본의 아니게 아내까지 들어앉힌 꼴이 되었다. 시간제 아르바이트라도 나가볼까 생각했지만 부유하지도 절박하지도 않은 처지가 발목을 잡았다. 생각 끝에 내린 묘안이 나만의 아지트를 마련해서 명분 있는 딴살림을 차리는 것이었다. 허름한 땅을 사겠다는 데에는 아내도 말리지 않았다. 

한 달여 발품을 팔고 다녀 보아도 어지간한 땅은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텃밭과 과실수 몇 그루씩 심으려면 삼사백평은 있어야 했다. 예산에 맞추어 산 땅이 저수지 뚝 아래인 이곳이었다. 저수지 뚝만 안 무너진다면 건축 허가가 안 난다는 것쯤은 상관없었다. 

이동식 콘테이너 하우스를 놓고 거처로 삼겠다는 말엔 아내가 펄쩍 뛰었다. 그는 단호히 밀어 붙였다. 텔레비전과 컴퓨터, 냉장고를 장만하고, 바둑판과 읽을 만한 책도 가져다 놨다. 아이 둘을 낳고 처음 내 집을 장만하던 그때처럼 의욕과 생기가 났다. 

처음 와 봤을 때는 심란한 얼굴을 하던 아내가 요즘은 슬그머니 자신의 것까지 챙겨다 놓는다. 스스럼없이 친구들을  불러서 밭일도 시키고 밤낚시를 가기도 한다. 어둘 무렵이면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퇴근하듯 집으로 간다. 비록 얼마간 두려움이 상존하는 뚝방 밑 집이지만  마음은 한결 여유롭고 편하다는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는 부도를 내고 도망 온 사람도, 가족의 핍박을 못 이겨 뛰쳐나온 백수의 가장도 아니었다. 욕심 안 부리고 자신의 처지에 맞는 생존의 돌파구를 찾아 즐기는 사람일 뿐이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부럽다고 했다. 

"그렇게 부러우면 당신도 우리 터 안에 오두막 하나 지어 딴살림을 차리시구랴. 설마 꼭 저수지 뚝 아래여야 하는 건 아니겠죠."  

퉁박을 주지만 나 역시도 나만의 아지트를 갖고 싶다는 욕망이 몽실몽실 피어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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