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복 수필가
정현복 수필가

어머님.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동녘 하늘엔 샛별이 찬란합니다. 당신께선 늘 첫 닭이 울던 이 시간에 일어나 두부를 만들어 저자로 달려가곤 하셨지요. 이 불초자식도 아침 일찍 일어나 분주하게 일하시던 어머님을 닮아 차츰 새벽형 인간으로 변했습니다. 복사꽃 피고 동박새 우짖는 이맘때면 이 아들은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님 생각에 사무칩니다.

어머님.

춘삼월, 이 좋은 계절에 어머님의 애환과 고달픈 삶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고향의 고갯길과 언덕배기와 둑길과 갯가를 돌아보면서 호강한번 제대로 못하시고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했습니다.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할 자가용을 타고 아스팔트로 잘 포장된 옥산재를 넘어가면서 가을철 어머님께서 문저리를 받아 다라에 이고 귀목정을 거쳐 화산과 옥산까지 팔러 다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님.

꼬불꼬불 망치 재 산허리를 돌아 지날 때도 어머님이 힘든 하루 일을 마치고 해질녘 이 재를 넘어 왕복 80리길 구조라까지 가서 새벽에 갈치를 받아 비포장 길을 줄달음을 쳐서 오시던 일이 기억납니다. 서른아홉 젊은 나이에 아버지와 사별하고 청상과부가 되었는데도 재가도 안하시고 올망졸망 넷이나 되는 어린 자녀를 키우시느라 허리가 휘도록 고생하셨던 어머님이 아니셨습니까.

어머님.

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월말고사 시험에서 학년 1등을 했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을 듣고 신이 나서 어머님께 달려가 자랑했더니 "이놈아, 먹고 살기도 힘든 집구석에서 1등하면 뭐하노, 중학교도 못 보낼낀데"하면서 한숨만 내쉬었습니다. 형편도 못되는 어머님은 한참동안 제 빡빡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어머님.

한번은 어머님께서 농사철에 일꾼들에게 먹이시려고 고두밥에 누룩을 섞어 애써 만든 밀주를 나무 볏가리 속에 깊숙이 숨겨놓았다가 술 치러 온 세무서 단속반에 걸려 압수당하고 장승포에 있는 본서에 가서 취조를 받고 날이 저물 무렵 파김치가 되어 타박타박 걸어오시던 모습을 보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제 생일날 찹쌀밥에 미역국을 끓이고 자반고기 한 마리 구워 성주 상 차려놓고 "조상님네, 조상님네, 우리 복이 우짜던지 흙 안 만지거로 해주고 뺀대 잡거로만 해주이소"하면서 거칠어진 손바닥을 서걱서걱 비벼대며 간절히 빌곤 하셨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저는 가난 때문에 정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일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일한다는 재건학교에 들어갔지만 기죽지 않고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운 어머님.

사설이 꽤 길었나 봅니다. 이 불효자식도 환갑이 넘어 이제야 살아온 인생을 뒤돌아보면 어머님의 기대와는 달리 허물과 실수와 상처투성이의 여정을 걸어온 듯합니다. 창밖에는 먼동이 터오고 아파트 화단에 심어진 나뭇가지에 뭇 새들이 날아와 재잘 됩니다. 인동초처럼 인내와 끈기로 사시다간 내 어머님,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평안과 복락을 그곳에서 길이길이 누리시기 바랍니다. 곧 틈을 내어 어머님을 뵙고자 성묘 길에 오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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