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25일 북한군 불법 남침으로 국군은 한 달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를 하게 됐다.

대구·부산만 방어하고 있는 위급한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이 미8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구원을 요청해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게 된다. 이로 인해 남하했던 공산군 일부는 북한으로 되돌아가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혔다.

1950년 11월 고현에 포로수용소가 생기면서 고현·상동·용산·해명·수월·양정마을 일대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됐다.

포로수용소에서 좌·우익의 갈등으로 포로들의 희생이 많았다. 이때 인민군 제2사단 참모장 이학구는 낙동강 전선이 불리해지자 자기 사단장 팔에 총을 쏜 후 미 제1기병사단에 투항해 거제포로수용소에 포로로 오게 됐다. 그는 자신이 투항한 죄를 씻기 위해 1952년 5월7일 도트 준장을 납치했다. 도트 준장이 인민군 포로들에게 납치되자 그 후임으로 콜슨 준장을 포로수용소 경비 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 사진은 콜슨 준장이 경비행기를 타고 장평비행장에 내리고 비행기가 돌아가기 직전에 지역주민과 학생들이 모여 비행기를 구경하고 있는 장면이다.

장평에 비행장이 생기게 된 것은 포로를 감시하는 경비병과 포로들의 식량과 의약품 운송 등을 위해서였다. 미군은 빠른 시간에 보급품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장평마을 해안가 도로변에 길이 500m 정도의 경비행장을 만들었다.

아래쪽 해안가에는 경비병과 포로가 먹고 입는 생활용품과 의료품을 저장하는 보급창고가 있었고, 옆에는 방어용 포대가 설치돼 있었다.
비행장 자리는 현재 삼성조선소 운동장과 조선소 일부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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