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내량 논갈이 모습.
견내량 논갈이 모습.

견내량은 거제의 관문이다. 1971년 4월8일 거제대교가 개통되기 전에는 배를 타고 견내량을 건넜다. 1950년 이후부터 차도선이 생겼다.

1965년 거제대교가 생기면서 견내량에 다리교각을 세우고, 교각아래 논에는 바지락을 양식하기 위해 소로 논갈이를 하고 있다. 그 뒤편에 부녀자들이 바지락을 심고 있고, 다리발 사이에는 견내량으로 건너다니는 배가 보인다. 그 뒤로 통영의 산들이 바다 길을 감싸고 있다. 소를 앞세워 힘들여 논을 갈고 있지만. 그 광경이 평화스럽다. 지금은 이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을 보면서 옛날을 되돌아본다.

한 장의 사진이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인 자료가 될까? 이 나루터는 많은 희비애락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고려 18대 의종왕이 정중부의 반란에 도망쳐 오면서, 왕이 이 나룻터를 건넜다고, 전하도(殿下渡)라 하던 것이 견하도(見下渡)로 변음 됐다가, 견내량(見乃梁)이 됐다.

조선시대 거제도로 귀양 오던 사람들이 이 나루터를 건너면서, 북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탄식을 했던, 눈물과 한이 서린 곳이다.

선착장에서 약 50여m 떨어진 산록에 무이루(撫夷樓)가 있었다. 이 누각은 견내량을 방어하는 진지 역할을 했다. 지금은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변했으나 당시의 길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에 누각이 설치된 것은 거제관문을 지키는 망대(望臺) 역할도 했지만, 외침이 없을 때는 선비들의 쉼터로. 이곳에서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기도 했다.

건너편 통영 쪽에도 이와 같은 누각이 있었다. 견내량에 있었던 무이루는 그 이름처럼 오랑캐의 동태를 살피던 곳이다.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오량역(烏良驛)의 진장(鎭將)에게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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