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창수 지세포제일교회 목사
천창수 지세포제일교회 목사

어떤 가정에 두 아들이 있었다.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고 있던 이 가정에 갑자기 근심거리가 생겼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했다. 죽기도 전에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유대사회 전통에서는 아버지 없이 사는 게 낫겠다고 하는 선언이다. 이는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말을 들어줬다. 살림을 큰 아들, 작은 아들에게 각각 나눠 줬다. 작은 아들은 그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다. 거기서 허랑방탕해 재산을 다 허비하고 빈털터리가 됐다. 궁핍해 살 길이 막막한 그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돼지 사료로 배를 채우려 하였으나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자신의 삶을 후회하며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연습하며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걱정하고 고민하며 연습한 말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그가 집 가까이 갔을 때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달려왔다. 그를 측은히 여겨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겼다. 살찐 송아지를 잡아 축하 잔치를 베풀었다. 누가복음에 나온 이야기다.

그가 찾아간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야말로 자녀들이 안겨야 할 영혼의 안식처이다. 자녀들이 사모할 마음의 쉼터가 바로 아버지인 것이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는 표현에 아버지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아버지는 매일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자로 어버이 친(親)자는 나무 목(木) 위에 설 립(立), 그 옆에 볼 견(見)자로 구성되어 있다. 아버지란 존재는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 서서 아들이 어디 있나 살펴보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몇년 전에 전남 여도초등학교 5학년의 한 어린이가 지은 동시이다. "우리 아빠는 왜 안경을 쓰실까/ 나를 더 자세히 보려고 안경을 늘 쓰시겠지/ … / 우리 아빠는 왜 키가 크실까/ 내가 어디 있나 찾으시려고 키가 크시겠지."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겼다. '측은'(compassion)은 영어로 com(함께)과 passion(고통)의 합성어다. 아버지가 아들의 고통, 아들의 아픔을 함께 느꼈다는 것이다. 아들의 실패를 나의 실패로 받아주고, 아들의 연약함을 함께 아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compassion! 그 아버지의 용서와 치유, 사랑은 끝이 없었다.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 이것이 아버지의 품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집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아버지 가슴에 못 박고 나간 자식, 아버지 말 안 듣고 자기 맘대로 하다 결국 망해버린 못난 자식, "거 봐라!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이게 인간의 심보다.

그런데 보라. 아버지는 무조건 받아 준다. 무조건 용서한다. "이놈아, 이 꼴이 뭐냐?" 나무라지 않는다. "어디 가서 뭘 했냐?" 과거를 묻지 않는다. 아버지를 떠난 삶, 묻지 않아도 너무나 뻔했다.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웠는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열 마디 말보다 그냥 안아줌으로서 모든 것을 녹여 버린다. 용서를 빌어서 용서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온 아들 때문에 기쁨에 겨워 잔치를 벌인다. 비록 상처투성이지만 아들이 돌아왔으니 기뻐하는 것이다. 잃은 줄 알았던 아들, 죽은 줄 알았던 아들, 돌아왔으니 마냥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이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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