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 내려올 때는 매가 먹잇감을 겨냥해서 내리꽂듯이 떨어지고, 오를 때는 제트기가 상승하듯 쏜살같이 오른다."

김종원 시인이 연날리기의 매력을 표현하는 말은 시가 된다. 매년 거제에서 열리는 '거제섬꽃축제'에서는 전통 연에 행사 현수막을 달아 올린다. 관람객은 우리 전통연 출현에 반갑고, 멋스러운 연의 유영에 눈도 즐겁다. 그런 이벤트 이면에는 40여년 한길로 묵묵히 연을 제작하고 연구해온 김종원 시인의 집념이 있다. 

1949년생인 김 시인은 경남 고성의 가난한 가정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고깃배를 타다 16세 되던 해, 산에 나무하러 가다 지게 작대기를 내팽개치고 부산행 버스를 타고 만다. 가난의 끝이 안 보였고 평생 '뱃놈'소리 밖에 못 듣겠다는 자괴감의 결과였다.

부산에서 노동자로 갖은 직업을 전전하다 군에 입대했다. 월남전이 발발하고 병력 손실 보충병으로 1970년 '백마부대 수색분대'에 배치되면서 그의 고단한 삶은 더욱 최악으로 치달았다.

전쟁이란 항시 죽고 죽이는 생사를 넘나드는 지옥이었다. 부대 성격상 전쟁의 참상을 최일선에서 맞닥뜨려야 했다. 순박한 성정의 김 시인에게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한바탕 접전을 치루고 살아서 돌아오면, 피 튀기던 전장의 잔상이 남아 제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밤이면 악몽에 시달려 잠을 이룰 수도 없었다. 1년이란 기간이 100년처럼 길었다.

1971년에 복귀해 군을 제대하면서 인헌무공훈장을 받지만, 전쟁 후유증은 가슴에 못처럼 박혀 고통과 상처는 깊어만 갔다. 가족부양을 위해 산업현장에 뛰어들었지만, 술이 없으면 잠들지 못했고 폐인이 되다시피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그러다 외항선 선원이 됐다. 오랜 시간 한정된 선상에서 생활해야 되다 보니 동료 선원들은 포커와 화투놀이로 시간을 허비했다. 하지만 그는 손에 책을 잡았다. 당시 외항선 선주들은 출항 시 부산 보수동에서 다량의 책을 구해 배에 실어줬다. 한국명작소설·대하소설·수많은 시집 등 "김승옥의 무진기행·이병주의 산야·쥘부채·지리산… 지금도 기억난다"고 그는 말했다.

전쟁 트라우마와 불면증 때문에 시작한 독서였지만 문학에 빠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2006년 서울문단에 등단한 그는 작년 '개밥그릇'이란 세 번째 시집을 냈다. 

연과의 만남도 어쩌면 운명적이었다. 1982년 대우조선에 입사하며, 거제 주택난으로 신접살림 집을 통영에 얻었는데 그곳에서 통영 연 만들기의 대가 해송 이상천 선생을 만났다. 어린시절 연날리기의 추억이 많았고 손재주가 남달랐던 그는 단박에 연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전통연 31가지를 연구하고 그 재단과 문양치기를 연마했다. 역사적인 유래도 쫓아가던 중 이순신 장군이 연을 이용해 임진왜란에서 함대 간 신호를 전달하던 체계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신호연에 대해 공부하던 중 진해해군측으로부터 자료요청을 받아 도움도 줬다.

연에 대한 집념과 해박함이 알려져 중앙·지방의 유수 언론사와 인터뷰하는 사례가 늘면서 해외에서도 그를 초청했다. 벨기에 국제연날리기대회·중국 청도국제연날리기대회 등에 초빙돼 세계 여러 나라의 연을 접했다.

"외국 연은 신속한 움직임에서 우리 연과 상대가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세계 유일하게 얼레를 사용한다. 얼레를 감았다 풀었다 하며 자유자재로 속도감을 줄 수 있다. 우리 조상님들의 지혜가 참 위대하다"며 "연이 하늘에서 재주를 부릴 때 그 움직임을 쫓다보면 마음을 뺏기고 만다. 또 하늘 멀리를 자주 보니 시력도 좋아진다"며 전통 연 예찬론을 폈다.

그는 거제청소년수련관·옥포종합사회복지관 등지에서 자신이 제작한 연 전시회를 수차례 가져 우리 전통문화의 수호전승자가 됐다. 또 옥포대첩기념제전 등 거제 각종 문화행사와 통영지역 학교 등지에서 전통 연 소개, 체험행사를 열어 재능기부도 한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연과 문학은 내가 지금껏 정상인으로 살 수 있게 구원해준 운명적인 존재였다"며 천진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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