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정 수필가
박찬정 수필가

왜소한 몸매의 그녀가 우산을 접으며 아파트 현관에 들어섰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파리해 보였다. 허둥지둥 서둘러 나가야 했던 일은 묻지 않아도 알만하다.

남매를 다 결혼시켰으니 홀가분하게 자신의 시간을 즐기며 인생 이모작을 꿈꾸는 나이건만 그녀에게 잠시도 한유한 시간은 없다. 같은 라인에 사는 친구의 권유로 등록한 복지관 취미교실에도 간 날보다 빠진 날이 더 많다. 그녀가 남보다 게으르거나 의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계획과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그리고 시집간 딸 때문이다. 다른 동기간들은  없느냐는 물음에 부모가 품에 품을 때 자식수와 부모가 기댈 때 자식의 수가 다르더라는 모호한 대답을 했다. 그저 만만하고 말 잘 듣는 자식만이 고달플 뿐이라며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연로한 시어머니는 혼자 산다. 지병이 있던 시아버지는 몇 해 전 돌아가셨다. 오랜 병구완에서 놓여나 마음의 긴장이 풀린 탓인지 어머니는 지난해부터 치매 증세를 보인다. 요양보호사가 드나들지만 혼자 계시는 시간에는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남이든 자식이든 사람을 만나면 없는 일을 꾸며내어 불평하고 이간질하는 것이 그 노인의 치매 증세다. 처음엔 오해하고 가족 간의 싸움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노인의 앞에서만 맞장구를 칠 뿐 곧이듣는 사람은 없다. 요양병원은 한사코 마다하고 시가의 다른 형제들은 남의일 보듯 하니 마음 여린 그녀만이 힘겨운 숙제로 떠안고 있다.

그녀의 고향은 멀다. 연년생 아이 둘을 돌보며 부업까지 하자니 힘들고 외로웠다. 마침 친정아버지가 타계해 적적해진 친정어머니를 가까이로 모신 것이 이십여 년 전이다. 노인에게는 그녀 말고도 자식 네 명이 더 있지만 노인의 손이 아쉬운 육아시기를 벗어나 어머니와 합가를 원치 않는다. 그녀의 아이들을 키워준 품앗이로 어머니 모시라고 떠미는 친정형제들이 야속했지만 자신이 혼자 감내하면 여러 형제 집안 편하다는 생각에 불평하지 않는다. 잔병치레 잦고 식성이 까다로운 노인은 근래 들어 부쩍 투정과 노여움으로 그녀의 신역을 들볶는다.

그녀의 딸은 결혼해 인근 도시에 살고 있다. 맞벌이 하는 딸은 직장과 육아와 살림 세 가지 짐을 지고 외줄타기 하듯 아슬아슬하게 산다. 그 세 가지 중 하나라도 휘청거리면 그녀가 딸네 지원군으로 간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가 그 많은 일을 무리없이 감당하는 줄 알고 있다. 아내가 세 사람 중 누군가의 지원군으로 불려가서 부재중일 때는 군말 없이 혼자 식사를 해결한다. 그나마 남편이 베푸는 선심이라서 고마워하고 있다.

그녀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그리고 딸을 지탱하는 중심축이었다. 그 중심축이 아무도 모르게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한 해 걸러 한 차례씩 받는 건강검진에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니 정밀검사를 받으라는 통지를 받았다. 아무도 모르게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은 결과 신장암 진단을 받았다. 서둘러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오는데 진동으로 해놓은 핸드폰이 가방에서 부르르 떤다.

무뚝뚝한 성격으로 곰살스러운데 없던 그녀의 남편이 적극적으로 팔을 걷고 나섰다. 그가 우선적으로 한 일은 아내에게서 두 어머니를 떼어내어 자신의 형제와 처가 형제들에게 각각 인계(?)했다. 딸에게도 이 기회에 어미가 여차하면 받혀주던 손을 떠나 홀로서기를 하도록 단단히 일렀다.

수술은 무사히 마쳤지만 고통스런 항암치료로 기진맥진 입원·퇴원을 거듭했다. 남편의 간호는 기대 이상이었다. 시가와 친가의 형제들이, 오랫동안 겪어낸 그녀의 노고를 깨달아가며 어머니 봉양에 애쓰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딸 역시 일인다역을 무난히 해내고 있다.

남편이 아내의 투병을 구실로 철통같이 쳐 놓은 바리게이트 안에서 그녀는 지금 오로지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아무도 그녀를 부려먹을 수 없다. 비로소 그녀를 지배하며 부려먹던 세명의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놓여났다. 비록 암과 싸우느라 얻은 해방이지만 그녀는 이제 자유롭게 자신을 위해 주어진 시간을 보낸다. 운신의 폭이 병원과 집과 시장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실로 오랜만에 해방구를 만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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