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윈난의 뤄핑에서 차로 열두어 시간, 내린 곳이 웬양이다. 띠띠얀(다랑이 논)으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유명 관광지다. 특히 사진작가들이 떼로 몰려든다. 논에 물이 받혀있는 시기에 관람객이 유독 많다. 저녁인데도 인산인해다. 빼어난 곳이라니 혼잡한 것쯤은 참기로 했다. 해가 떠오르는 순간의 장관을 놓치지 않으려면 어둑새벽부터 나서야 한다기에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규모에 압도되고 빛의 아름다움에 환호했다. 특히 일출, 일몰 풍경이 대단하다. 대자연의 쇼가 펼쳐진다. 햇빛에 반사되는 물빛의 현란함. 태양의 각도에 따라 변화하는 색의 향연. 구불구불한 경계선의 유려함. 해와 물과 땅이 빚어내는 빛의 향연.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웠다.

갈색의 굵은 나이테다. 손가락마디가 살아 꿈틀댄다. 녹색 뱀이 기어 나와 또아리를 튼다. 밀려드는 파도다. 사진작가가 아니라도 모두 열광한다. 시시각각 수천대의 카메라 렌즈와 손 전화기 렌즈에 띠띠얀의 외양이 낱낱이 실린다. 은둔의 논배미가 한 켜, 한 켜 옷을 벗고 만다. 하니 고산족의 삶의 흔적이 빛깔과 선의 광휘로 환원되는 현장이다. 아름다움으로 환치되는 현장이다.

웬양은 고도 삼천 미터의 고산지역이다. 가파른 경사지에서 논을 일구며 천 삼백여년 동안 대를 이어 무공해 유기농법으로 쌀을 생산해 온 지역이다. 물을 관리하는 지혜와 기술과 상상 할 수 없는 노동이 요구되는 가혹한 농지. 깨끗한 공기와 물, 원시 농법 탓인지 이 지역 쌀의 기름진 밥맛도 뛰어나다. 수로를 관리해 위 논에서부터 차례로 물을 대고 계곡에서 일천 팔백 미터까지 계단식으로 벼농사를 하며 천 가구 정도가 공동체를 이루며 산다. 천년 세월 세상은 급속히 변하였어도 여기 사람들은 옛날 방식의 가치를 이어가며 농사를 짓고 있다.

수백 수천 층의 계단식 땅을 일구기가 어디 만만 했겠는가. 이마의 굵은 주름살 같은, 고단한 삶의 이력 같은 다랑이 논이다. 사투를 벌리며 둑을 만들고 물을 가두며 피땀을 흘렸을 것이다. 관광객이 밀려드니 이제 생활도 나아졌으려니 싶은데 결코 아니다. 볕에 그을리고 벼랑 바람에 찢겨 부어터진 볼때기가 여전히 고달픔을 말해준다. 아이들은 새벽 찬바람에 내몰려 삶은 달걀을 팔러 다닌다. 대바구니 지게 속에 갓난것을 업고 괭이를 든 여인의 삶도 애달프다. 긴 장대로 논의 오리들을 몰고 다니는 여인의 목청에는 고단함이 가득하다.

논두렁을 걸어본다.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아쉬워 겨우 한 뼘 남짓한 논 두둑. 좁다. 황토의 점성이라 단단하다고는 해도 공중에서 줄타기 하듯 위태롭다. 쌀 한 톨이라도 더 얻으려고 둑을 쌓고 물을 모았다. 수로에 물은 경쾌히 흐르고 있는데 꼭 통곡소리다. 농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고여 논물이 되고 그 물로 농사를 지었을 게다. 밀려드는 관광객의 발길에 농토가 훼손될까 농부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 수로 곳곳에 널려있는 쓰레기 더미며 넘쳐나는 차량들도 심상치 않다. 아름다움을 눈에 넣느라 하니족의 자연한 삶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선가. 장관으로 보이던 풍광들이 지난한 삶의 나이테로만 보인다. 켜켜이 쌓인 설움인 듯 애잔하다.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며 아름다운 풍광까지 빚어 낸 이들에게 감사함과 미안함이 교차한다. 한 층 한 층 쌓아 올리며 하늘에 닿고 싶었을 거다. 천국에 닿으면 고달픔도 끝이 날거라 소원했을 게다. 극한의 인내로 빚은 천상의 계단 이었을 게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 하늘에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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