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거제, 도시를 디자인하라④]주민 주체로 도시 디자인 한 일본 마나즈루마치와 가와고에
어촌마을 마나즈루(眞鶴), 전통도시 가와고에...공공디자인 시작은 '주민'

디자인이 전통과 조화를 이룬 도쿄는 건축과 디자인을 공부하는 이들이라면 꼭 들려야 하는 장소가 됐다. 사람도 많고 땅은 좁은데 멋진 건물도 많고, 제대로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디자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도시는 초고층 빌딩으로 무장한 도쿄가 아니다. 작은 어촌마을 마나즈루 정(町:한국의 동에 해당하는 구획)과 전통도시 가와고에 정이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디자인 도시 중 하나다. 두 지역의 디자인의 핵심은 바로 '주민'. 공공디자인에서도 주민의 목소리를 중요하게 여긴 일본식 '주민으로부터 시작한' 디자인이 제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주민주체로 도시디자인의 도시가 된 일본의 마나즈루 마치.
주민주체로 도시디자인의 도시가 된 일본의 마나즈루 마치.

어촌마을의 변화, 마나즈루 마치

마나즈루 정은 도시 자체가 기복이 심해 복잡한 지형을 이룬다. 평탄한 곳은 거의 없고 지맥이 깊게 돌출해 마나즈루반도를 형성하고 있다. 거제시와 비슷한 환경을 지니고 있는데 아름다연 자연경관이 일품인 도시다. 1956년 주변 마을과 통합되면서 지금의 마나즈루 정의 모습이 이뤄졌는데 북부에는 채석장이 위치해 있고, 항만시설도 개발돼 있어 어업도 왕성한 곳이다. 최근에는 관광산업이 도시 전반에서 발전하고 있어 새로운 유형의 도시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마나즈루 정이 관광산업이 최근 급격하게 중심산업이 된 이유에는 '도시디자인'이 한 몫을 했다. 인구 9000여명 밖에 되지 않는 어촌마을에다, 눈에 띄는 멋진 빌딩 하나 없는 평범한 곳이지만 일본에서는 최고의 디자인 실험 도시다. 장승포·지세포·능포·옥포 등 대표적인 거제지역 항만 시설에는 각종 모텔과 횟집 간판이 알록달록하게 빛을 발하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그 흔한 모텔도, 횟집 간판도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주민마다 갖고 있는 '미의 기준'이라는 디자인 코드 집 때문이다. 마나즈루 정 주민들은 마당을 꾸미거나 돌담을 바꿀 때, 대문을 교체할 때에도 이 지침서를 펼쳐놓고 경관 가이드라인에 어긋나지 않는지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지침서가 주민들의 삶에 제약을 주거나 피해를 안겨준 것이 아닌, 주민들의 삶속에서 디자인을 찾되 편의성을 갖췄기에 주민들이 사소한 것 하나라도 경관 가이드에 맞출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마나즈루 정 주민들이 직접 '미의 기준'을 따르는 데에는 지자체에서 상명하달 식으로 만든 가이드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나즈루 정 주민들이 처음부터 참여해 "우리 마을은 이렇게 꾸며졌으면 좋겠어요", "우리 마을과 어울리는 경관은 이렇습니다" 등 마을 간담회가 시초다.

마나즈루 정은 경관 가이드라인이 지어지기 전인 1980년대만 해도 무분별한 리조트와 펜션 개발로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면서 지역의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청사진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공론화 됐고 1991년 지역주민과 지자체, 전문가 집단이 함께 '마을 만들기 조례'를 만들기 시작했다.

수십 차례의 공청회를 통한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만 2년 만에 조례가 공포됐다. 홍보에만 6개월이 걸렸다. 당시 적극적인 의견을 피력했던 마나즈루 주민 스즈키 유우나(64)씨는 "공식적인 만남은 수십 차례밖에 되지 않은 듯했지만, 마을 주민들끼리 앉았다 하면 마을 만들기 조례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얘기뿐이었다"며 "비공식적인 간담회까지 포함하면 수백 차례의 공론장이 펼쳐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협의를 거쳐 도출해낸 마나즈루 정만의 지역 만들기의 핵심은 '無(무)개성이 개성'이었다. 유우나 씨는 "관광명소나 대형 쇼핑몰도 없는, 그저 우리 마을은 작은 어촌마을일 뿐인 우리 마을을 살리자는데 의의를 뒀다"면서 "그래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우리 마을의 철학"으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실제 마나즈루 정은 노인세대가 많고 노인이 쉬면서 풍경을 즐길 수 있는 마을로서의 성격을 조성했다. 집과 집 사이에 놓인 벽에 콘크리트 대신 지역에서 생산되는 돌로 쌓아 마을 특색을 살리게 하며 눈에 바로 띄지는 않지만 은은함이 있는 마을 디자인으로서 발전했다.

그 정신이 '마을만들기 조례' 제정 이후 30여년 동안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이 스스로 결성한 '녹색모임' 덕분이다. 녹색모임의 사토우 유이(49)씨는 "마을에 대한 디자인의 중요성이 주민속으로 스며들면서 환경·시민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며 "마나즈루 정은 이 모임이 있는 한 100년 후에도, 1000년 후에도 같은 모습으로서 특색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가와고에. 주민들의 삶속에 들어온 디자인 문화가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지 세계적 사례가 됐다.
가와고에. 주민들의 삶속에 들어온 디자인 문화가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지 세계적 사례가 됐다.

일본의 역사가 담긴 가와고에 정

사이타마 현(縣·한국의 道(도)에 해당하는 구획)의 가와고에 정. 에도시대부터 에도(도쿄의 옛 이름)에 필요한 물자를 보내 '작은 에도', '에도의 부엌'이라고 불리던 전통도시다. 현재는 주말이면 전통 건축 양식과 전통 과자 거리를 보러 오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통거리 '이치반가'는 우리나라 인사동처럼 전통 상가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개발 열풍이 한 차례 일었던 일본에서 가와고에 정은 '전통'을 살릴 수 있었던 힘 역시 '주민'이다.

일본 전역에 개발 열풍이 불던 1970년대는 가와고에도 예외가 아니었고, 1980년대에는 에도시대의 전통 주택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은 '전통을 살리자'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치반가에서 상업을 운영하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전문가·지자체 등이 참여해 '이치반가 거리 만들기 위원회'가 꾸려졌고 이들은 전통 가옥을 보존하고 상가를 활성화 시키자가 주된 목적이었다. 전통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의 특징인 전통과 역사를 자원으로 상업 활성화에 도전한 것이다. 지금의 도시재생사업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치반가 거리 만들기 위원회는 각 통·반의 반상회처럼 운영됐다. 그들은 420m에 이르는 전통 거리의 풍경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건물 높이는 2층으로 제한했고 간판의 색깔도 일정한 톤을 유지했다. 가와고에의 전통 가옥 색인 '검정색'에 맞춰 채도를 조절했다. 잘못 보면 전체적인 거리 분위기가 우중충해 보일 수 있지만, 전통의 색을 맞추기 위한 노력은 관광객에게 시선을 끌었다.

가와고에 정의 우체국이나 우체통도 검은색이고 길가 건물의 주차장 셔터도 검은색이나 회색이다. 간판은 검정과 나무색으로 통일감을 줬다.

1989년 가장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5개 점포가 위원회의 계획에 따라 새롭게 만들자 그 일대가 전통 가옥 보존 바람이 불었다. 마을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전통 문양과 소품 가게가 늘어났고 자연스럽게 관광객들이 증가했다.

새로 간판을 바꾸거나 외관을 꾸밀 때는 반드시 위원회를 소집해 주민 전체의 의견을 듣고 반영했다. 매달 한 번씩 반상회처럼 위원회를 열어 마을의 변화상을 점검했다. 이처럼 주민들이 나서자 지방정부 역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가와고에는 그렇게 세계 최고의 디자인 도시가 됐다. 도시는 아름다워졌고 상업은 활성화된 것이다.

하라 도모유키 이치반가 상가협동조합이사장은 "우리 거리는 우리가 지키자고 의기투합했다"며 "지역 주민이 그 지역 최고 전문가 아니냐. 우리 거리가 어떻게 해야 아름다울 수 있고, 우리 뿐 아니라 후손들까지 이 거리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한 끝에 좋은 결과물이 나와 감사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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