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번역은 번역으로 창작은 창작으로 할 것

번역과 창작은 우리의 신문학 건설 운동에 꼭 같이 필요한 두 사업이다.

우리의 고문학 중 그의 내용, 그의 체제가 족히 신문학의 모범될만한 가치있는 저작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니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외국의 가치있는 창작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우리의 참고로 삼아야 되겠고, 우리 신문학 건설의 유일한 목표가 세계 어느 문학보다도 위대한 작품을 내는 대에 있는 이상 우리는 그의 준비로 무엇보다 창작을 존중하여야 되겠다.

그러나 번역과 창작은 그의 목적, 그의 방법이나 전혀 다르다. 번역이란 외국말이 부족한 자기의 민중과 외국의 위대한 작품을 소개하기 위하여 그것을 자기말로 옮기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유일한 목적은 되도록 원작의 의사를 읽지 아니함에 있다. 이와 반대로 창작이란 인정과 사회의 미묘한 골을 자기가 되도록 잘 모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가치는 그의 내용- 그의 모사의 방법여하로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의 문단에는 과거 몇 해 동안 여러 선진의 노력으로 적지 않은 번역과 창작을 내었다.
난역으로 유명한 섹스피어의 극까지 번역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번역계에는 아직까지 장편을 단편으로 줄이는 축역과 원작보다 자기의 의상을 준중하는 의역이 적지 않고 우리의 창작계에는 외국의 작품 그대로를 모사한 작품만이다.

심지어 그네들 중에는 외국에서 출판된 작품을 자기의 마음에 맞도록 고쳐 ‘자기의 창작이다’고 항고하는 작품까지 있다.

학술이나 시사에 관한 논문은 축역, 의역이 별로 문제되지 아니할 것 같다. 같은 소설, 극본-같은 순문예적 저작은 이것이 역시 문제될 것 같다. 역자가 작자보다 더-위대한 재능을 가지기 전에 이러한 번역이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은 사실이다.

톨스토이의 장편부활이 우리말로 단편해당화가 되고 만 것은 대단히 아까운 일이다.
번역의 이상은 원작의 의상을 되도록 잊지 않는데 있고, 창작의 이상은 사회와 인생을 되도록 잘 그리는 대에 있는 이상 우리는 결코 이 두 가지를 혼용하여서는 안 된다.

‘번역은 번역으로-창작은 창작으로…’
우리는 어디까지나 딴 정신과 다른 방법으로 우리의 두 가지 공작을 계속하여야 되겠다.

Ⅴ.조금만 쓰려던 것이 의외로 길어졌다

현대의 문학-특히 우리의 문단에 대하여 연구와 이해가 부족한 기자가 참고할 책 조차 없는 객지에서 총총히 쓴 것이니 아마 불충한 점이 많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신문학 건설이 다른 모든 사업과 같이 우리 청년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될 필수의 사업인 이상 우리에게는 그의 방법에 대한 계론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잇따른 논문의 목적은 그와 같은 계론-신문학 건설의 방법에 대한 계론의 초안이 됨에 있다.

따라서 그의 방법이 잘 결정되고 잘못 결정됨은 초안의 완전 불완전보다도 여러 생각의 수정여하에 있을 것이다.

이 글을 마칠 때에 기자는 다만 국내, 해외의 여러생각 - 특히 신문학 건설에 대하여 많은 연구나 이해가 되는 여러 선생님의 건강과 지도를 바랄 뿐이다. 1923년 6월18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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