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언수/계룡수필 회원

모임이 많아질수록 밤늦게 집에 들어가는 일이 는다.

처음엔 언제 오느냐 성화를 하던 아이들도 이제는 엄마를 기다리지 않는다. 어느 새 제 할 일 알아서 할 줄 알고 문단속까지 하고 잔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평소와 다름없다. 왜 늦었는지 묻거나 타박도 없다.

어릴 적에 엄마가 모임에 나가 늦을 때면 동생과 둘이 놀다가 잠이 들곤 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심통을 부리기도 했다. 아이에게 엄마는 그저 엄마일 뿐 ‘사람’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다. 엄마는 집에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맛있는 밥 짓는 사람이다.

비가 오면 우산 들고 학교 앞에서 기다려주는 사람이다. 준비물 빠뜨리면 갖다 주는 사람이다. 같이 책보고 텔레비전보고 노는 사람이다. 늘 곁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엄마다. 아이에게 엄마는 그런 사람이다.    

대학 이학년 겨울에 대만에서 한 달 동안 지냈을 때의 일이다. 어학연수 오신 방통대 중문과 아주머니 네 분을 시내에서 만났다.

그 분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행복한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이들도 남편도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지. 그들과 헤어진 후 우리끼리 ‘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침을 튀겼었다.

엄마가 된 후로 가끔 그 아주머니들이 생각난다. 그 때 그분들이 느꼈을 흥분이 어떤 것인지 차츰 이해하게 된다. 가끔은 엄마 아내 며느리라는 이름이 발을 옭아매는 족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들에겐 일주일동안의 그 시간이 얽매임 없는 ‘자유’그 자체였을 것이다.

엄마도 사람이라는 것을 엄마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엄마도 숨 쉬어야 하는 사람이다. 사회적 활동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무엇인가를 배우며 즐길 수 있는 사람이다. 엄마도 사람이기에 화가 난다.

때론 술잔을 기울이며 울기도 한다. 엄마도 사람이기에 가끔은 친구가 그리워 찾아간다. 쌓였던 이야기들을 풀어내느라 시간가는 줄 모른다.      

집밖으로 나와서 웃고 조잘댈 때는 누구의 엄마도 아내도 며느리도 아닌 ‘나’다. 소유격이 아닌 자유로운 사람으로 존재하는 시간은 그 어느 시간보다 소중하다. 밤 모임에는 늦은 시간에 대한 걱정이 자라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정도는 아니다.

딸아이가 예전에 내가 느낀 감정들을 답습하리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것 또한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내 딸이 자라 또 엄마가 될 것이므로.

엄마가 여자라는 사실이 혼란스러웠던 적도 있다. 등을 밀어 주기 위해 욕실에 들어가 지켜본 엄마는 명화속의 나부(裸婦)였다.

외출준비를 위해 머리를 말고 옷을 고르며 흥얼거리던 엄마의 모습은 소녀 같았다. 그럴 때면 ‘엄마’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엄마를 하나의 존재로 받아들이는 일은 내가 성인이 되어서야 가능했고, 엄마가 되어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늦은 시간 밖에 있으면서 아이에게 자라고 할 때의 나는, 어릴 적 엄마 모습으로 오버랩 된다. 아이에게 야단을 칠 때의 모습도 내가 제일 싫어했던 엄마의 모습이다.

나는 엄마처럼 그렇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것들이 가끔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나 엄마와 달리 이내 아이에게 다가간다. 미안하다 사과도 한다.

내 엄마보다 한 걸음 나아진 모습이다. 딸아이가 엄마가 되어서 지금의 나처럼 엄마를 이해할 때 즈음엔 딸과의 관계가 더 원만해지면 좋겠다. 딸에게 엄마는 역할모델이다. 엄마의 모습을 기본으로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한다.

아직 어린 딸은 엄마를 이해하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을 이해해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실제로 그 사람의 처지가 되어보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딸로서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엄마가 되어서야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오늘은 엄마에게 전화라도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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