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노자산 아랫마을에 늙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영감은 젊어서부터 일이라고는 손에 잡아보지도 않고 아침에 눈을 뜨면 잠 들 때까지 책만 읽었다. 집에 먹을 곡식이 바닥나고 굶어 죽을 판인데도 영감은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책에만 정신이 팔렸다.

"영감, 먹을 게 다 떨어졌어요."
"그런가?"

할멈이 다그쳐도 그게 남의 일 인양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또 책에 빠졌다. 할멈은 복장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책을 읽었으면 도가 터도 텄을 것 아니오. 어찌 한 번 해보소"
"할멈, 저 아랫동네 김영감 집에 가서 쌀되박이나 얻어오소"
"얻어 오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인제 부끄러워 못가겠네요."
"그러지 말고 이번 한번만 더 갔다 오소. 아랫길로 가지 말고 산길로 갔다 오소"
"좋은 길 놔두고 왜 하필 무서운 산길로 가라하요?"
"시키는 대로 하소"

할멈은 하는 수 없이 산길로 아랫마을 김영감집에 곡식을 빌리러 갔다. 그런데 어떤 젊은이가 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있다가 할멈이 지나가자 하는 말이

"나한테 패철이 있는데 별 필요가 없으니 필요하거들랑 가져가시오"
"패철이 뭔데요?"
"무덤 자리를 정할 때 쓰는 나침반(羅針盤)이지요."
"우리 영감이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니까 주면 되겠네요. 그럼 나한테 주이소."

하고 패철을 얻어 집에 와서는

"이걸 갖고 가서 돈이나 좀 벌어 오소"

하고 영감을 채근했다. 할멈의 등쌀에 견디지 못한 영감이 패철을 허리춤에 차고 집을 나섰다. 그동안 책만 읽고 살다보니 밖에 나와도 마땅히 갈만한 곳도 없어 무작정 걸었다. 한 사날 걷다가 지치고 날도 덥고 해서 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데 어떤 젊은이가 지나가다가 자기도 더운지 영감이 옆에 앉아 쉬었다. 마침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바로 위에 묘가 둘 있었다. 젊은이가 혼자 소리로 하는 말이

"저 큰 묘는 판서가 나올 무덤이고, 작은 묘는 남의 손에 맞아 죽은 사람의 묘구나"

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 영감은 마을로 내려가 제일 큰 집으로 들어가 패철을 보이자 그집 대감이 유명한 지관인줄 알고 극진히 대접을 하면서

"오신 김에 우리 무덤이나 좀 봐 주시오"

하고 청했다. 영감은 다음날 대감과 함께 어제 총각이 일러준 그 무덤으로 왔다. 영감은

"저 큰 묘는 판서가 나올 무덤이고, 작은 묘는 남의 손에 맞아 죽은 사람의 묘구나"

하고 젊은이가 한 말을 그대로 했더니 대감은 어떻게 그렇게 족집게처럼 잘 맞추느냐고 깜짝 놀랐다. 대감은 이렇게 용한 지관을 놓치고 싶지 않아 다음에 우리 집안에 초상이 나면 꼭 와서 묘자리를 잡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 논 서너 마지기 값이 훨씬 넘는 돈을 아낌없이 줬다.

많은 돈을 가지고 집에 오자 할멈은 역시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한다며 영감을 치켜 세웠다. 그런데 유명한 지관이라고 소문이 나면 다른 사람들이 찾아 올 것이 뻔하고 더구나 대감집에 초상이 나면 불려갈 것이 염려 돼 패철을 부셔버리고 그날부터 눈먼 봉사 흉내를 내며 아무 것도 못한다고 소문을 냈다. 그리고 대감집에서 받아온 돈으로 논을 사서 할멈과 잘 살았다는 이야기가 남부면에 전해오고 있다.

사람들은 영감을 도와 준 그 젊은이가 도깨비였다고 말하고 있다. 

윤일광 詩人(자료 : 거제향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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