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업 전 무공수훈자회 거제시지회장6

6월은 호국보훈의 달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그 희생에 감사와 추모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입대해 전쟁터로 달려가 목숨마저 초개와 같이 조국에 맡겨 화랑무공훈장을 받았으며 노년에는 자유민주주의체제하의 조국통일 성업달성과 국가발전에 기여했던 전성업 전 무공수훈자회 거제시지회장을 만났다.

전 지회장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3월 일본 기부현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고등학교 8년을 졸업하고 선소공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때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전 지회장은 군수공장이었던 도요타 자동차회사에 다녔던 이유로 징병을 면해 해방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전 지회장은 경남 함안군 외가댁에서 살았다. 그러나 1946년 전염병인 '콜레라'가 창궐하고 엄청난 홍수로 댐이 무너져 농사마저 망치는 등 지독한 가난과 전염병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해방 후 '우익과 좌익'으로 나뉜 이념논쟁과 "면장이 죽었다" "반장이 죽었다" "반동분자다"라는 등의 빨치산소행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과도기 대한민국의 시대상을 반영했다. 국가관이 투철했던 전 지회장은 광복청년단에 입당해 밤에는 각 마을에 나가 빨치산과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독한 가난 때문에 1947년 전 지회장은 마을친구 4명과 돈을 벌기위해 부산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그해 9월9일 군에 입대했다.

부산 동래초등학교에 집결해 당시 초량초등학교 임시훈련소에서 각개전투, 위장법과 포복, M1소총 분해·결합·사격연습에 이어 4일째 진동전투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전 지회장을 다시 일본으로 보냈다. 전 지회장은 부산을 거쳐 일본 구주에 주둔해 있었던 UN군 3사단 7연대 3대대 3중대 3소대에 편성돼 또 다시 훈련을 마치고 1950년 11월 인천에 상륙해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첫 전투에서 수류탄 파편에 이마, 무릎, 왼손에 부상을 당한 그는 3개월간 입원치료를 받고 부산 양정포로수용소에 배치됐다가 반공포로 200명을 인솔해 UN LST선을 타고 거제도 장평에 도착했다. 

당시는 본격적인 포로수용소 건립작업이 시작된 때였다. 양정골 수용소 건립이후 반공포로부터 수용해 중공군 포로와 인민군 포로는 고현·사등·용산·문동쪽에 수용됐다.

전 지회장은 101헌병대 32경비대대로 전속돼 포로수용소에서 경비를 맡았다. 이 당시 땅 밑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수상함을 느껴 상부에 보고해 폭동을 목적으로 만들어지던 땅굴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공로로 전 지회장은 1951년 11월23일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전 지회장은 1955년 6월 제대하고 함안군 가야면에서 대형트럭을 운전하며 합천·산천·함안·부산까지 장작을 운반하기도 했다. 이후 시계 수리기술을 배워 점원생활을 하다가 1962년 2월 거제도 사곡에 정착했다.

전 지회장은 "최근 정치하는 사람들이 무조건 남북을 통일부터 하자고 한다"면서 "북한도 잘 살게 만들어 놓고 통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6.25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싸운 사상전쟁"이라며 "이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리고 싶다.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북한은 공산주의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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