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석 논설위원

▲ 이아석 남해안시대포럼 의장
사람이 참 어리석을 때가 있다. 가령 겨우 하루 한 번 뭍으로 나갔다가 해거름에 들어 온 객선을 보면서, 다 내리고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던 미련이 기억난다.

뱃전 너머로 해가 저물고 어둠이 번져 오는 부두에서 대체 뭘 기다리고 바라보았는지, 인연에 대한 그리움과 미련을 그때부터 배워 온 것인지, 이미 폐선이 되어버린 세월의 그 시간들을 골똘하게 떠 올리곤 한다.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얼마 전부터 하나씩 떠나버리는 친구들과의 인연이다. 한 친구는 그렇게 오랜 인연은 아니었지만 필자보다 더 어리석게 세상을 바라보거나 가족을 제대로 거두지 못하는 처지로 늘 남을 돕고 즐거운 화두를 던지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둘러 봐도 만만한 상대가 보이지 않았던 시절에 그 친구가 왠지 덜 야물어 보인다는 자신감으로 함부로 충고를 해대거나 심지어 꾸지람을 해도 대인답게 수용하고 털어버리는 처세를 배운, 그런 호인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병원 찾았다가 충격적인 병명을 들었고 불과 두어 주 만에 떠나버린 친구의 영정 앞에서 왜 그렇게 울었는지 싶을 정도로 슬퍼야했다. 잘 알려진 작가이지만 오래전부터 형 같은 친구로 배낭여행을 하며 대마도로부터 일본역사를 함께 탐방해 온 그가 암 투병으로 떠났을 때 한참을 허탈감에 빠졌다.

마지막 열정으로 엮어 낸 '인연'의 마음들이 그렇게 와 닿고, 장난기로 똘똘 뭉쳐졌던 젊은날의 객기들이 하나씩 뇌리를 스치면서 이미 앞서 갔던 그의 문학세계를 함부로 충고했던 어리석음이 자책으로 무겁게 눌리고 말았다.

그와 함께 더듬었던 해상 장보고의 사적이나 애환들이 숙제처럼 남아 머리를 맴도는 사이 한 분 밖에 없는 형을 떠나보냈고, 마치 세상 인연들이 작심한 듯 떠난다고 투덜대면서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는 한 가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작심을 했고, 고향 생가의 이웃집에서 유년을 함께 보낸 지기들과 어울리는 모임에 뒤늦게야 가입했다.

마치 이 인연들은 놓칠 수 없다는 조바심으로, 이 기억들만은 뼛가루처럼 세월의 강에 함께 뿌려 보고픈 마음으로 소주잔을 나누며 신고식을 했고, 사림(沙林)이라고 부르는 갯가의 모래언덕 골목길을 달리던 얼굴들을 보배처럼 쓰다듬고 싶었다.

복근이·상락이·상길이·상연이·동민이를 겨울 구들장 온기처럼 꼭꼭 외우고 가슴에 새겨 넣어야 했다.

여리고, 어리고, 향수에 물씬하게 젖어버린 이 응어리들이 달처럼 떠 있는 고향을 우리는 그렇게 사랑하고 모두 닮아가는 세상일까 하고 중얼거린다.

모두들 그렇게 지인들을 떠나보내고 가슴앓이를 할 것이다. 누군가를 알고 만난다는 일이 또 다른 이별을 준비하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어김없는 철리(哲理)를 전제하는 것이지만, 그런 뻔한 일에 울고 웃는 게 인생이고 '사는 게 별 거 있더냐'고 노래해야 한다.

새로운 인연을 향해 꿈꾸고 도시를 누비던 세월에서 남아있는 인연을 보듬고 매달려 가야하는 세월로 바뀌어버린 때를 우리는 노년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지막 실낱같은 인연마저 끊어지면 고독과 주검이 기다릴 것이다. 사람의 생물학적 나이를 셈하면서, 산 것 같지 않은 세월까지 셈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지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인연을 기억하지 못하는 삶은 식물인간의 상태여서 물질의 존재로 여길 뿐, 삶을 영위하는 가치는 사라진다.

그런 열악한 상태를 유지하거나, 그런 가족을 돌보는 지인을 보면서 우리는 건강을 귀하게 여기고, 건강한 시간을 즐기는 것이다. 저 달이 휘영청 둥글면 대보름일 것인데, 이번 보름날에는 사림의 골목 친구들을 껴안고 그 어린 날의 다리목에 서서 설움처럼 차오르던 밀물이라도 바라보아야겠다.

떠나보낸 친구가 그리우면, 개펄이 검게 드러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우리가 사는 이 행성의 생명을 준 어머니로 살아 숨 쉬는 저 달을 다시 바라보아야겠다. 차오르다 빠져나가고 다시 차오르는 갯마을의 숨결이 곧 달의 숨결이고, 그 어느 터전보다 깊게 내린 달집의 소원을 태우면서 이 땅을 살아가는 의미를 새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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