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석 칼럼위원

▲ 이아석 남해안시대포럼 의장
사람이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고급 아파트나 주택이 살기에 편리할 만큼 갖추어 지는지, 품격에 맞추어 사람이 입주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폼생폼사에 이력이 난 사람들은 대체 그 옷이라는 게 디자인 땜에 입는지, 색깔 때문에 입는지, 어딜 가리고 어딜 내 놓는지 헷갈릴 때가 많다.  

요즘 도로는 사람이 가기 위해 있는지, 차가 달리기 위해 있는지 구분이 안 된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차 안에 사람이 있는 걸 몰라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마을과 마을이 이어진 도농 간의 지방도에도 아예 인도가 없이 도로를 만드는 해괴한 도로행정을 비꼬는 말이다.

사람보다 돈이 더 대접 받는 환경이 된지 오래다.

생활의 절대적 수단인 화폐를 쟁취하기 위해 인륜을 거스르는 일이 다반사이고, 경쟁과 이기심이 대립하면서 돈이면 만사가 형통이라는 인식이 삶을 지배하게 되었다.

돈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남을 끌어들여 부부까지 해치는 판인데 세상에 이것보다 더 귀중하고 더 가치가 있을 게 뭐 있냐는 말도 수긍이 간다. 그런 수준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어지간히 돈을 벌어도 보았거나, 돈 때문에 고통을 당하면서 평생을 시달려 온 분들의 대체적인 생각 속에는 돈은 그저 생계에 필요한 유통의 체계일 뿐 그 많고 적음에 사람이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만약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라는 구도 속에서 늘 돈의 많고 적음에 의해 삶의 가치를 결정하고 행복과 불행의 잣대로 여긴다면 거시적인 계획 아래 혁명을 해서라도 이 구도를 무너뜨려야 옳다.

지금 우리가 우려하는 사회 양극화의 정도가 어느 만큼 깊어지면 개개인의 능력이 그대로 돈으로 계산되거나 우발적인 횡재를 해서라도 돈을 갖고 보자는 등식이 모두 범죄로 이어지거나 파탄을 부르는 극적인 현상들이 난무할 수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종말을 예고하는 이런 징후들이 지금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공산주의의 실험을 통해 비극을 경험해 온 세대들이 우려하는 반대의 또 다른 우려가 속출하는 세상에서 과연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삶의 가치를 찾아야 하는지 혼란의 늪에 빠져버린 형국이 되었다.

요즘 어떤 이들이 이런 문제와 해답에 골몰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 해답이 인문학의 권장이라고 여기고 거의 산업화 된 대학의 비중에서 돈의 만능을 인간중심의 사고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일어나고 있다. 매우 고무적이고, 뒤늦은 감이 있지만 그 에너지를 지켜 볼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시급한 작업이 산업사회의 동참과 정치권력들의 성찰이다. 인문학적 사고라고 해서 서구의 피렌체나 르네상스를 떠올리고 철학의 근간을 서구화하는 방식은 지양되어야 한다.

그 정도의 인문학적 고찰이나 배경이라면 동양의 자연사상과 철학이 더 심오하고 인간중심의 성찰에도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대로부터 우리 선조들을 비롯한 동양사상과 철학을 통해 올바른 역사관을 배우고 토양과 기질에 맞는 인문학을 권장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여기에 부합하는 교육적 환경을 조성하고, 무엇보다 산업화의 필요불가결한 폐단에서 번져 난 물질만능주의를 각성할 사회적 노력이 병행되어야 마땅할 일이다.

단지 인문학을 이해하거나 교육한다고 해서 서구 철학과 교육의 발상지를 다투어 해설하는 것은 미술의 기본을 가르치느라고 서양 조각상만 댓상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역사의 여행을 통해서 동서양을 망라한 인문학적 가치를 조명하고 산업성장에서 야기된 병폐를 바로 잡는 작업이야 말로 우리의 교육사회가 나아갈 가장 숭고한 가치라고 여기는 마음이다.

무작정 고전 방식이나 사고가 서구와 서기에 있다고 믿는 맹신을 바로잡고 학문적 토양을 이해함이 인문학적 가치를 드높이는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인문학의 권장이 갖는 인간사회의 가치조명은 아무래도 돈보다는 사람이 우선되는 지혜와 바탕을 가르치는 포럼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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