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제3도크 및 안벽으로 바뀐 장평 피솔마을…1990년대 초에 마을주민들 이주

▲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가 들어서기 전 개발되지 않은 상황의 장평 들판. 멀리 피솔마을(붉은 동그라미 안)이 보인다.

피솔의 유래와 주변지형

2013년 11월말 현재 3만582명의 시민들이 살고 있는 장평동은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로 대표되는 곳이다. 세계 3대 조선소 중 하나로 발돋움한 삼성중공업으로 인해 이 지역 주민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늘어나는 주민들로 인해 이 지역은 항상 개발수요로 넘쳐나고 있으며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는 조선소 직원들로 인해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역동적인 풍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로 넘쳐나는 장평동은 하지만 삼성조선소가 들어서기 전까지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한때 한국전쟁으로 포로들이 밀려들어오면서 번잡하기도 했지만 이후 조선소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평온했던 곳이다.

▲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가 들어설 무렵의 장평 전경.
조선소 건설로 인해 장평동의 자연마을들이 일부 사라진 가운데 가장 최근에 삼성조선소에 편입된 마을 중 하나가 피솔마을이다. 이 지역에서 마지막으로 주민들이 이주한 때는 1990년대 초중반이다. 삼성조선소의 제3도크와 안벽을 조성하면서 이제는 마을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피솔마을의 옛 지명은 피소울(避小鬱)로 고현성의 바람을 막아주는 울타리로 통했지만 뒤에 피소울이 피솔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또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중국 명나라에서 이여송 장군의 조병영양사(調兵領粮使) 겸 총독장(摠督將)으로 나온 천만리(千萬里) 장군의 5세손인 천우발(千宇發)이 고성에서 가족을 솔거(率去)해 피신해 와서 살았다고 해서 피난할 피(避)와 거느릴 솔(率)을 합쳐 피솔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이외에도 붉은 적송이 울창해 붉은 피와 같다고 해서 피솔 또는 혈송(血松)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지역은 1990년대 중반 이주하기 전까지 약 20여 세대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피솔마을은 2개의 마을로 구분해 안피솔과 바깥피솔이 있었다. 이 마을의 주업은 어업으로 각종 해산물이 풍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솔마을에서 반도처럼 튀어 나온 산이 있었는데 이 산의 맨 끝자락 바닷가에도 5세대 남짓 살고 있었다. 이 작은 마을의 이름은 다갈바위마을이며 바닷가 마을의 특성상 수산업에 의존하는 전형적 어촌마을이었다. 피솔마을의 이름이 특이한 것처럼 주변 지형에도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예스러운 지명이 많이 산재해 있다. 이 지역의 지명 대부분이 지금 들으면 재미있는 특이한 이름을 갖고 있다.

▲ 세계 3대 조선중 하나로 발돋움한 삼성조선의 모습. 동그라미 부분이 옛 피솔마을.

피솔마을과 사등면 사곡리 사이에 보면 조그마한 야산이 있는데 생긴 모양이 옛 사람들이 쓰던 탕건(宕巾)을 닮았다고 해서 '탕건산'이라고 불렀다.

특히 피솔마을 주변에는 바위가 많았다. 탕건산을 지나 바깥피솔과 안피솔의 경계지점에 큰 바위 2개가 20m 간격으로 있었다고 하는데 하늘을 향해 꿋꿋하게 서있는 모습에 '선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바깥피솔에는 크기가 약 70여 평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바위가 20도 정도의 경사로 노출돼 있었는데 이 바위의 이름은 '비렁바위'였다. 이 바위 7부 능선쯤에는 샘이 있었다. 일년 내내 마르지 않았던 이 샘은 피솔마을에 가뭄이 들었을 때 유일한 식수원으로 사용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샘의 물을 긷기 위해 배를 이용하거나 동네 아낙들이 물동이를 이고 와 물을 길어 갔으며 가뭄 때 빨래터로 이용되기도 했다.

안피솔 주변에도 '다갈바위'라는 바위가 있었다. 안피솔과 이 바위 사이의 바닷가에 바위와 자갈이 많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또 안피솔에서 다갈바위를 지나면 문턱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는데 그 모양에서 착안해 '문턱바위'라고 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바위들이 삼성조선 부지를 조성하는 동안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지명을 기억하는 것은 피솔마을과 주변에 살았던 사람들 정도에 불과할 것으로 보인다.

▲ 옛 피솔마을

피솔 주변 지역

피솔마을 이외에도 삼성조선소 건립으로 인해 사라진 마을들은 많다. 완전히 사라진 마을이 있고 현재의 장평동 번화가로 바뀐 마을도 있다. 피솔 주변 지역 중 나안방(羅安方)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삼성조선 건설 전 약 40여 세대가 살고 있던 이 지역은 안전하게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렸다는 설과 불교의 나한과 같은 장수라는 뜻의 나한방(羅漢方) 또는 바닷가 겨울이 너무 추워 내한방(耐寒坊)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양지몰'이라는 마을은 피솔과 신촌 사이에 있던 바닷가 마을을 양지쪽이라 해서 양지마을이라 불렀다. 약 36세대 정도가 살았으며 이 마을에는 갯호라는 갯마을에 16세대와 본마을에 20세대가 살았다고 한다. '갈우지마을'은 약 25세대가 살았는데 연곡마을의 동북쪽 바닷가에 형성된 갯마을로 가로지·갈우·서목·조항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와치신촌마을은 약 25세대가 살았으며 나안방 모퉁이에 형성된 마을로 포로수용소로 인해 소개됐던 주민들이 1956년부터 돌아와 정착하면서 생긴 마을이다.

또 양지몰 위쪽에 옛날부터 내려오던 마을을 '웃몰(누운티)'이라고 불렀다. 이 마을은 나안방과 신촌·양지몰·웃몰·피솔·다갈바위 등을 대표하는 마을이었다. 이외에도 장평마을·다리거리(교량)마을·번득마을·사기장골·장평신촌·중땀마을·고랑몰마을 등 여러 마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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