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마을-장평 피솔]마을주민 차정명 씨 인터뷰
비포장에 가로등 없는 밤이면 무서워 단숨에 집 앞으로 달렸던 기억 '선명'

▲고현동주민센터 차정명 계장

20여 세대 남짓 살던 피솔마을 출신 실향민을 찾아 나섰지만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장평 출신 지인에게 아쉬움을 토로하자 한 사람을 추천했다. 현재 고현동 주민센터에 재직중인 차정명 계장이었다.

순간 머리를 탁 쳤다. 가까운 곳에 두고 멀리서 찾는 어리석음에 대한 분풀이였다. 곧바로 그를 찾았다.

지난 93년쯤 피솔마을을 떠나왔다는 차정명 계장은 어린 시절 너무 어렵고 힘들게 살았고, 고향을 떠나오던 순간까지 보상 문제로 마찰을 겪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곳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고향에 대한 기억들이 오롯이 남아 있고 표현과 달리 애착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고향을 떠나온 때가 20대 초반, 공직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으니 피솔마을에 대한 기억들을 비교적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또 기자와 동갑내기로 평소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다보니 이야기가 술술 풀렸다.

"촌동네에 뭐 먹고 살만한 게 제대로나 있었건데. 바다를 끼고 있으니 거기에 매달려 생계를 이었지. 피솔 사람들은 주로 멸치, 물메기, 미더덕, 오만둥이, 홍합, 바지락, 피조개 등을 작은 규모로 양식하거나 어장을 하면서 살았지, 뭐."

전형적인 어촌마을인 피솔은 농사에 부적합해 바다에 기대어 삶을 사는 순박한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했다. 같은 장평동이지만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다 보니 당시 장평초등학교까지 한 시간 남짓 걸어 다녔다고 했다. 이미 삼성조선소가 들어선 이후 초·중·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등하굣길에 삼성조선과 관련된 에피소드 몇 개쯤은 있기 마련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버스가 없어서 걸어 다녔는데 한 50분 이상 걸어야 학교에 갈 수 있었제. 비포장길이라 비가 오면 곳곳에 웅덩이가 생겨 거길 지나가려면 허리 반쯤은 젖어서 등교하고 그랬지. 중학교 때 쯤으로 기억되는데 가로등이 없으니 밤이 되면 많이 어두웠다 아이가. 피솔로 가는 길 가에 공동묘지하고 비석이 있는데 겁 난께 막 뛰다 보면 50분 걸리던 길이 15분 밖에 안 걸리고 그랬다."

시골마을에 살다보면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비포장과 밤길에 대한 추억을 그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삼성조선 초창기 쯤의 기억으로 파업하는 근로자들을 피해 초등학교를 등교한 기억도 있다고 했다. 그때 딱 한 번 파업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이후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 걸어 다녀야 했던 피솔 주민들에게 버스가 제공된 것은 그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그러니까 1980년대 후반 정도. 그것도 시내버스가 아니라 삼성조선에서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하루 세 번 정도 다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했다.

차 계장의 집안도 당시 바다를 터전으로 살았기 때문에 생선 등 각종 해산물을 잡아다가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이때 운송수단은 동력선이었다. 고기를 잡던 배로 이번에는 돈을 마련하려 가는 것이다.

지금의 장평부두가 있는 곳에 당시에도 부두가 있어 삼성조선을 우회해 그곳까지 가곤 했다고 한다. 거기서 배를 정박하고 지금의 장평오거리 일대 시장에다 내다 팔았다는 것.

"당시 잡히는 고기들이 노래미, 도다리, 문조리 등인데 한 다라이(대야) 싣고 가서 다 팔면 5~8000원 정도 받았다. 지금으로 치면 한 7~80만 원어치 정도 되는데."

당시 진해만을 끼고 있던 특성으로 인해 겨울이면 대구도 잡았던 것으로 기억하던 그는 "그때도 대구가 비싸긴 했는지 분명 잡은 것은 봤는데 한 번도 먹어 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비싼 대구를 통영의 서호시장에 모두 팔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난하던 시절, 부모들은 바다에 나가 며칠을 고기잡느라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제대로 된 밥도 못 먹기 일쑤.

점심 사먹으라고 준 돈은 당시 초등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뽀빠이' 과자 사먹는데 모두 탕진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점심은 물 몇 모금이 전부가 되고 말았다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쯤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삼성조선소에 만든 배들을 지금의 오비 쪽 바다에 띄워 놓았는데 배가 얼마나 큰지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땟마(전마선)를 직접 노를 저어 가까이 가봤는데, 멀리서 보던 거하고는 너무 다르더라. 배가 얼마나 어마어마하던지 놀랐다. 너무 신기해서 손으로 배를 직접 만져보기까지 했다. 그때 당시 만들던 배가 그렇게 크게 느껴졌는데 지금 만드는 배들은 얼마나 큰지 상상조차 안된다."

그렇게 호기심 많고 개구졌던 차정명은 20살 때 동경했던 연상(年上)의 여인과 함께 버스를 타고 진주로 시험 치러 갈 수 있다는 기쁨에 공무원 시험에 응시, 덜컥 혼자만 합격해 지금 거제시를 위해 일하고 있다.

가난했던 어린시절의 고생, 고향을 등지고 떠날 때의 분노, 쓰레기장으로 인해 고생했던 기억 등 많은 아픈 기억들 보다는 아련한 그리움이 더 크게 다가오는 그의 고향 피솔. 그곳은 이제 일반인들이 갈 수 없는 금역으로 변했지만 대양을 누비며 세계 속에 한국을 심고 있는 대형 선박들이 건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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