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석 칼럼위원

▲ 이아석 남해안시대포럼 의장
요즘은 전자정보시대의 혜택 탓인지 인구통계를 한답시고 호구 조사 하는 일을 구경하기 어려운 일이 되었지만 가구마다 애완동물을 가진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리기 힘들만큼 애완동물이 많아졌다.

공동주택의 경우 엘리베이터를 타면 개를 안거나 데리고 선 사람들과 곧잘 마주치는데 비좁은 공간에서의 모양새가 영 어설프다. 애완동물을 보는 시선이 대범한 사람도 있지만 짜증과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도 많고, 특히 공동주거공간에서의 애완동물 사육을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주로 개나 고양이로 대변되는 애완동물을 가진 사람들은 '내가 좋아 키우니 뭐가 잘못이냐'는 식의 극히 개인적 폐쇄성을 드러낸다. 서로 어울린 공동 주거의 특성상 더러 근처를 지나기만해도 으르렁대는 경우가 있고, 미리 경계를 하기도 전에 얼씬거려서 사람을 놀래기도 하는 애완동물을 태연하게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의 태도는 아무래도 달갑지가 못하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지극히 비좁은 원룸 시설 같은 곳에서도 성행하고 시비가 잦아지고 있다는 데 있다.

독신세대가 급격히 늘어 난 지금에 와서 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굳이 애완동물을 금한다면 이것도 형평에 어긋난다고 여길지 모르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상실 정도는 아닐지 모르나 홀로 갇힌 판단이 낳는 결과가 이웃 사람보다는 동물을 더 애지중지해야 할 만큼 편중되어버리면 인심은 각박해지고 급기야는 애완동물 때문에 스트레스를 주고받는 비인간적인 풍토가 생겨나는 것이다.

필자도 개를 무척 좋아한 적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셈하면 다섯 마리 정도의 애완견을 키웠는데 주거공간이 아파트로 바뀌면서 아쉽지만 애완견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공동주택환경에서 개를 키운다는 생각이 옳지 못하다고 여겼다. 물론 개의 행태나 애완동물의 성격에 따라 키울 수 있는 정도가 있을 것이고 지나친 것도 있을 수 있다.  남의 이목이나 간섭을 싫어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더러는 가족보다 더 애지중지하는 애완동물을 두고 무슨 판단을 한다는 일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애완동물에 대한 집착이 많을수록 유기견이나 유기동물이 늘어나고 부작용이 만만찮다는 사회적 고민조차 안중에 없다는 것도 큰 문제다.

심지어 어떤 이는 애완동물이 자신을 따르거나 보호 아래 순응하는 걸 느끼면서 타인보다 더 소중한 존재라고 여기는 병적인 언행을 하는 경우가 있어 인간성의 환멸을 자아내게 하는 모습도 보인다. 애완동물에 대한 사육부작용이 생기거나 폐단이 있다고 해서 키우는 행위를 금지할 수도 없는 일이고 보면 이제는 애완동물을 갖는 일에 대한 교육도 어릴 적부터 행해져야 한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산 짐승을 아무 공간에나 가두고 순종하게 하는 사육이 아니라 적어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을 환경과 주의를 가진 사람일 수 있어야 한다는 자각을 갖게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애완근성은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고 인심을 그르치게 하는 빌미가 된다.

더러 당연한 가족의 도리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책무를 외면하면서까지 애완동물에 매달리는 행위는 온당하지 못하다.

살기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한 지나친 애완동물의 편애나 사치에 가까운 관리가 주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흔히 요즘 '개 보다 못한 팔자' 타령을 늘어놓는 사람들의 속내에는 그런 혐오를 주는 사람에 대한 폄하와 조롱이 담겨있는 법이고 당연히 애완동물의 지나친 편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혐오가 깊게 깔려있다.

얼마 전 조카로부터 값비싼 강아지를 선물 받은 친구가 그걸 돌려주면서 하던 말이 기억난다. '부질없는 정이라도 사람에게 주는 게 인심'이라 여기며 살았다고 했다.

강아지를 싫어하는 성품이 아니지만 주변 환경과 사육으로 인한 자신의 집착을 미리 감지하는 친구에게서 사리를 분별하고 생각하는 연륜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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