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3일까지 둔덕 방하마을 생가 주변에 청마꽃들 개장하고 청마문학제 진행
주차장 등 편의시설 확충하고 묘소 주변부지에 '청령정' 조성해 새로운 볼거리

청마(靑馬). 그를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독일의 낭만파 시인 노발리스(Novalis, 본명 프리드리히 폰 하르덴베르크-Freiherr von Hardenberg)다.

그의 미완성의 소설(원래는 서사시) '푸른 꽃(blaue Blume)' 때문이다. 푸른 말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듯 푸른 꽃 또한 세상에 없다. 하지만 시인 유치환은 푸른 말(靑馬)을 호(號)로 삼았으며 노발리스는 미완성이지만 글로써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두 사람 모두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에는 틀림없다. 세상에 없는 것들을 추구했으니 말이다. 그런 두 사람을 연관시키게 된 이유는 아주 단순하게도 '푸른'이라는 색깔이었지만 두 사람은 닮은 구석이 많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

우선 그들은 시인이다. 그리고 당대의 주류를 이루던 문인들과 교감이 많았다. 유치환이 김춘수나 김상옥 등 시인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것처럼 노발리스는 관념론적 철학자 피히테의 영향을 받고 슐레겔 형제 등 문인들과 친했다.

노발리스는 자아와 우주, 자아와 영원한 것과의 사랑에 의한 신비적 일치만이 그의 평생 과제였다. 그는 마술론적 관념론을 바탕으로 현세의 죽음은 '영원한 고향', '근원적인 생'에 대한 회귀라는 인류사의 비의로까지 승화시켰다.

제6회 청마문학상을 수상한 박진희 교수는 유치환의 시세계에 대해 노발리스와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지난달 27일 열린 청마문학 세미나에서 유치환의 시세계를 '생에 대한 긍정과 무한자연'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 생의 유한성은 죽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유한한 생에 대한 인식태도에 따라 죽음에 대한 인식 또한 달라지게 된다. 생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연결될 수도 있고 겸양과 경건의 태도로 이어질 수 도 있는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 한계라 할 수 있는 유한한 생에 대해 긍정적 의식을 담지하고 있는 유치환의 시에서는 죽음에 대해서도 긍정적 의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축복으로까지 인식하기에 이르고 있다"고 밝혔다.

이 말처럼 대체로 청마의 작품은 허무를 극복하려는 남성적, 의지적인 시향으로 사람의 삶 어디에나 있는 뉘우침·외로움·두려움·번민 등의 일체로부터 벗어난 어떤 절대적인 경지를 갈구했으며 그 해결의 길을 일체의 생명적인 것에 대한 허무주의적 자각에서 찾고자 했다.

두 사람 모두 죽음에 대해 노래하면서 이를 부정이 아닌 긍정, 근원적으로 돌아가야 할 이상향으로 보고 있다. 한 사람(노발리스)은 이를 낭만적 시각으로 바라봤고, 다른 한 사람(유치환)은 이를 허무로 인식하지만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극복의 대상으로 바라본 유치환 시 곳곳에는 그러한 관념적 세계의 근원이 된 거제시 둔덕면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타나고 있다.

청마, 사람을 부르다

올 가을, 청마의 고향 둔덕이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9월말부터 10월초에 이르는 일주일동안 12만여 명이 다녀간 것.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청마의 넋이 깃든 둔덕을 다녀간 이유는 생가 앞 15ha에 이르는 들판에 코스모스가 만개했기 때문이다.

'청마꽃들에 靑馬가 산다'라는 주제로 개장된 청마꽃들 축제는 생가가 있는 둔덕면 방하리 507-5번지 일대를 코스모스 군락으로 만들어 청마조형물·풍차·원두막·벤치·이동식화장실·포토존 등 편의시설을 개선하고 농산물직거래장터, 향토음식점 운영, 특산물 전시판매 행사 등을 운영했다.

또 임시주차장을 확보해 큰 불편없이 성공적인 축제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했다. 청마의 생가와 기념관을 연계한 축제를 통해 모처럼 조용하던 둔덕면이 활기를 되찾았다.

특히 '과거·현재·미래 그리고 靑馬'라는 주제 아래 열린 제6회 청마문학제가 청마기념관과 묘소, 시비공원 일원에서 열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드넓은 벌판에 울긋불긋 피어난 코스모스와 함께 이제 막 시작된 가을을 하나의 축제로 승화시켰다.

기자가 주말을 맞아 청마꽃들을 찾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벌판을 거닐고 있었다. 연인과 함께인 경우도 있었고 가족이 함께 찾은 모습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노랗게 익어가는 가을들녘 한편에는 추수에 여념없는 농부들이 한적한 시골마을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전원(田園)의 낭만을 선사하고 있었다.

이처럼 둔덕면 방하리가 꽃과 사람, 시와 전원이 공존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청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이를 조장하기 위해 노력한 민·관의 노력이 있어 가능했다.

청마문학제를 주최한 동랑·청마기념사업회(회장 김운항)와 청마를 재조명하고 거제의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정착시키기 위한 거제시의 노력 덕분이었다.

기념사업회의 끈질긴 노력과 이를 수용한 거제시는 경남 양산시에 있던 청마의 묘지를 고향으로 옮겨 오고 주변에 부지를 확보해 생가를 복원하고 청마기념관을 조성했다.

특히 올해처럼 성공적인 '청마문학제'가 가능했던 것은 지난해부터 청마묘소 주변 공원화사업을 추진해 거제를 대표하는 관광명소로 꾸미기 위한 거제시의 계획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거제시는 기념사업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생가 및 기념관 주변 들녘을 꽃밭으로 조성했다. 당초 청마의 시에 등장하는 유일한 꽃인 해바라기를 식재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계절적 특성을 살리는 코스모스로 가닥을 잡아 마을주민들과 협의를 통해 꽃밭을 조성했다.

올 가을 12만 관람객을 끌어 모은 효자의 탄생이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콘텐츠가 더해졌다. 청마의 묘소가 있는 둔덕면 방하리 산76번지 일원에 탐방로를 설치하고 청마정원을 조성했다.

청령정으로 가는 길

청령정이라고 이름 붙여진 청마정원은 그의 시집 '청령일기(1949)'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잠자리가 바로 '청령'이다. 멀지도 않은 우리주변에 있으면서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는 잠자리는 어쩌면 청마가 추구했던 허무의 극복일지도 모른다.

땅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창공을 마음대로 비행하지만 땅에서 결코 멀어지는 법이 없는 잠자리는 그의 시 세계에서 추구했던 관념의 집합체일지 모르겠다.

청령정은 청마꽃들을 지나 산길을 따라 걸으면 나타나는 청마묘소에서 오른쪽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2~3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산길을 따라 잠시 걸은 것뿐인데 청령정에 도착하면 탁 트인 시야가 마음마저 상쾌하게 만든다. 방하마을의 벌판과 둔덕천 끄트머리에서 나타나는 바다, 그리고 그 주변을 수놓은 수많은 섬들이 비경을 연출한다.

또 청령정으로 향하는 길 주변에는 혹시라도 사람들이 잊어버렸을까, 가을이라는 계절을 알리기 위해 각종 풀벌레들이 울음을 울고 있었다. 잠자리가 친구들을 불러모아 자기 정원을 찾는 이들에게 마치 '축가'를 선사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방문보다는 삼삼오오 청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걸음만 허락하겠다는 태세였다.

청령정에서 돌아 나와 청마묘소 주변을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의 대표작들이 비석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의 시들을 음미하는 시간이 될 수 있는 의미있는 공간이다. 또 올해 완공한 '청마 연혁벽'은 청마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둔덕, 청마의 관념 세계를 만들다

다시 '청마'라는 시인에게로 돌아와서 그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풀어보자. 그와 관련해서는 통영과 둔덕을 두고 시비가 많이 일었다. 고향에 대한 문제였다. '통영이다 거제 둔덕이다' 하는 문제를 놓고 양 시가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이는 그의 남다른 성장배경 때문이었다. 그가 태어나던 시절을 전후해 거제와 통영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묶였다. 통영군으로 통합된 시절이었다. 또 둔덕과 통영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그가 3살 되던 해 집안이 통영으로 이주했다.

통영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불거진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청마의 출생지는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가 맞다. 그의 관념적 세계가 형성된 것도 따지고 보면 방하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청마의 시에서 나타나는 허무는 태생적 근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유전자 염기서열 507-5번에는 '허무'가 각인돼 있다. 그가 태어난 생가에서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면 저 멀리 보이는 산마루에 '페왕성(둔덕기성)'이 자리잡고 있다.

8대를 내리 살아오면서 그의 선대들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폐왕 '의종'의 허무가 그에게도 유전된 것이다. 그런 허무를 극복하게 만든 것은 출생 후 붙여진 그의 아명(兒名)에서 찾을 수 있다.

"청마는 1908년 음력 7월14일 둔덕면 방하리에서 아버지 유준수와 어머니 박우수의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명은 돌처럼 단단하고 산처럼 여물어 오래 살라는 뜻에서 '돌메'라 불렀다."

청마기념관에 가면 '청마 유치환 시인의 생애와 삶'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마당 앞에 버티고 선 우두봉 정상의 폐왕성과 마주해 그의 집 뒤편에 버티고 선 산방산 정상의 큰 바위는 그의 근원적 한계인 '허무'를 극복하게 만드는 의지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돌메'라는 아명을 통해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독특한 관념의 세계관은 바로 이같은 지리적 특성과 환경을 지닌 둔덕면 방하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그가 통영에서 태어났다면 이러한 정신세계가 형성될 수 있었을지 의문스러운 부분이다.

청마를 깨운 사람들

지난 1967년 2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한 이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가던 청마를 다시 일깨운 사람들은 지역의 후배 문인들이었다.

지난 1996년 7월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 이채영(본명 이금숙) 씨를 비롯해 몇몇 지역 문인들이 동랑·청마 생가복원 및 기념관 건립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듬해 4월 양산시 백운공동묘지에 있던 청마묘소를 현재 위치인 둔덕면 방하리 지전당골로 이전해 안치하고 6월에는 '동랑·청마기념사업회'를 발족했다. 이 사업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던 이영호 시인의 역할이 컸다.

이영호 회장에 이어 1999년 2월 이성보 시인이 2대 회장에 취임하면서 통영시와 출생지 문제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이어 2005년 2월 취임한 제3대 최태황 회장에 이르기까지 출생지 문제는 논란거리가 됐다. 소송까지 갔던 청마의 출생지 문제는 7년간의 공방 끝에 일단락됐다.

그리고 2008년 4월 청마기념관이 준공되고 탄생 100주년 기념 '제1회 청마문학제' 및 '제1회 청마연구상 시상식'이 개최됐다. 1회 수상자로 방인태 교수가 결정됐다.

이어 2009년 3월 제4대 회장으로 이금숙 시인이 취임하고 청마문학제 및 각종 청마 관련 사업을 반석 위에 올린 뒤 제5대 김운항 회장에게 바통을 넘겼다.

청마와 관련 취재를 위해 만난 이금숙 시인은 '동랑·청마 기념사업회'의 일련의 과정을 설명하며 지역문인들의 그간의 노고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다. 또 올해 청마꽃들이 탄생하기까지 기념사업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꽃들 조성에 적극 발벗고 나선 농업개발원 관계자들의 노고도 잊지 않았다.

특히 그는 지난해와 올해 청마문학제를 위해 메세나를 자처하며 적극 지원한 '신현농협'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작년과 올해 신현농협에서 각각 1000만원씩 2000만원을 지원했다"면서 "더 고마운 것은 '청마통장'을 만들어 브랜드화하고 그 이익금으로 2억원의 기금을 조성하겠다고 밝힌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사업 관련 척박한 지역현실에서 더없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청마의 미래가 밝을 것으로 내다봤다.

마지막으로 그는 "청마에 대한 관심과 함께 이제 그의 형인 동랑에 대해서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며 "동랑과 아무 관련 없는 통영에서 동랑의 이름으로 연극제를 하는데 거제가 너무 뒤처지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친일·반일'을 떠나 문인으로서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살았던 역사의 조명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국내 연극의 '시초'로서 동랑을 바라보자는 것이었다.

깊어 가는 가을, 추수가 끝난 들녘과 꽃이 지고 난 자리가 아름다운 둔덕으로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청마를 만나고 풀벌레 소리가 아름다운 청령정을 거니는 여유를 가져보자.

● 청마연보
-1908년(출생) : 경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507번지에서 음력 7월14일 유생인 아버지 진주 유씨 준수(晉州 柳氏 焌秀)와 어머니 밀양 박씨 우수(密陽 朴氏 又守) 사이의 8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 장남은 극작가 동랑 치진(東朗 致眞). 3세 때 경남 통영시 태평동 500번지로 이주.
-1918년(11세) : 통영보통학교에 입학.
-1922년(15세) : 일본으로 건너가 부장(豊山)중학교 입학.
-1923년(16세) : 9월 형 치진이 주도한 토성회(土聲會)에  참여, 시 발표
-1926년(19세) : 귀국,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
-1927년(20세) :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 졸업(제4회),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이 무렵 '참새'(통영 참새 모임회 간행) 제2권 제1호(4집)에 토막시 '단가(短歌)' 발표.
-1928년(21세) : 연희전문학교 문과 1학년 중퇴. 10월 11세부터 알고지내던 경성 중앙보육학교 출신인 안동 권씨 재순(安東 權氏 在順)과 결혼.
-1930년(23세) : 데뷔작 시 '정적(靜寂)'을 문예월간 제2호에 발표
-1937년(30세) : 통영으로 이주.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 취임. 동인지 '생리(生理)'를 부산시 초량동에서 펴냄.
-1939년(32세) : 12월 '청마시초(靑馬詩抄)' 펴냄. 시 '깃발' 외 53편 수록
-1940년(33세) : 3월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 사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빈강성 연수현 유신구 2호로 이주
-1945년(38세) : 6월말 귀국. 통영문화협회 조직. 10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 취임
-1947년(40세) :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제1회 시인상 수상. 6월 시집 '생명의 서' 펴냄
-1948년(41세) : 시집 '울릉도' 펴냄
-1949년(42세) : 월 시집 '청령일기' 펴냄
-1950년(43세) : 3월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9월 경남문총구국대 결성, 동북부전선을 종군
-1954년(47세) : 10월 시집 '청마시집' 펴냄
-1956년(49세) : 3월 경상북도 제1회 문화상 수상
-1957년(50세) : 2월 한국시인협회 1·2·3대 회장 역임(1957~1960년), 12월 시집 '제9시집' 펴냄
-1958년(51세) : 2월 아시아재단 자유문화상 수상. 12월 '유치환 시선' 펴냄
-1960년(53세) : 12월 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펴냄
-1963년(56세) : 7월 제7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1964년(57세) : 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장 추대. 11월 시집 '미루나무와 남풍' 펴냄. 12월 부산시 문화상 수상
-1965년(58세) : 11월 시선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펴냄
-1967년(60세) : 2월13일 오전 9시35분 부산시 동구 좌천동 앞길에서 자동차 사고로 부산대학병원 이송 중 영면(永眠). 장지는 부산시 사하구 하단동 승학산 기슭. 사망 후 하기락과 공동편찬한 '사랑과 모랄과 진리'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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