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구천댐 건립으로 20가구 강제 이주…거제 곳곳으로 흩어져
1세대 절반 이상 세상 떠나…이주민들 "꿈에서라도 다시 볼 수 있다면".

▲ 1984년 절골마을이 사라지기 전의 마을 풍경. 소박하지만 사계절 아름다운 풍경과 천혜의 계곡을 자랑하는 잡목군총의 비경지였다.

고향은 그리움이다. 고향 근처에 살아도 항상 그립다. 바로 지척에 있는 고향도 한 번씩 찾을 때면 포근함을 준다. 그래서 고향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하지만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남북전쟁 때 이주한 피난민들뿐만 아니라 거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 중에도 실향의 아픔을 간직한 이들이 있다.

동부면 구천리 절골마을. 지금은 구천댐이 들어서 옛 모습을 찾을 길 없는 절골마을은 한 때 '구천계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거제시민들이 즐겨찾는 명소 중 한 곳이었다.

아름다웠던 절골마을의 옛 모습과 그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실향민들의 이야기를 들어 봤다.

◆평화로웠던 마을, 이별을 만나다

1980년 초, 평화로웠던 동부면 한 마을의 주민 60여명이 뿔뿔이 흩어졌다. 수정처럼 맑은 물이 흐르던 천혜의 계곡도 물밑으로 잠겨 버렸다. 마을주민들이 이주한 이유는 간단했다. 정부가 생활용수와 공업용수 마련을 목적으로 구천댐 건설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 옛 절골마을 자리에 현재는 댐이 들어서 물이 가득 차 있는 모습.
댐 건설 결정으로 이주가 확정되자 마을주민들은 난감했다. 황당함을 넘어 애통함을 감출 수 없었다. 쥐꼬리 만한 돈을 받고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다.

댐 건설 사업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도 현실은 그닥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상 대대로 지내오던 마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중장비들이 진을 쳤다. 기계들의 힘은 대단했다. 낮밤도 없었다. 선산은 파헤쳐지고 집들은 허물어졌다. 물길도 막혔고 농작물도 생기를 잃어갔다. 1983년도의 일이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마을이 사라져가는 광경을 본 주민들의 마음에는 피눈물이 고였다. 1984년 6월, 마을주민들의 이주가 끝났다. 댐 건설 사업도 가속도를 붙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을이 물에 잠긴다는 소리가 주민들의 귀에 들려왔다. 주민 모두 약속이나 한 듯 허겁지겁 공사현장으로 달려갔다.

'콰과쾅.'

지축을 울리는 폭파음이 고막을 때렸다. 순간 마을주민들의 마음 한구석도 무너져 내렸다. 뿌옇게 올라오는 흙먼지 사이로 고향마을이 보였다. 일순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뺨을 지나 목 언저리로 뜨끈한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울음을 참는 이도 있었다. 절골마을과의 영원한 작별은 그렇게 끝났다. 

◆추억 속에 스며든 우리의 고향

▲ 마을이 사라지기 전 구천계곡에서 놀던 청년들의 모습.

절골마을 주민이었던 구천마을 유원주(69) 이장은 그 당시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조상님들의 선산을 파헤지고 물을 막아 농작물이며 마을의 자연이 눈앞에서 훼손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 때 심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애통했다"며 "나 뿐만 아니라 마을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 본 20가구의 주민들이 아직까지 애환을 잊지 못한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절골마을은 '조선시대 유명한 절이 있었던 골짜기'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절 사(寺)에 골짜기 곡(谷)을 써 '사곡'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전설로만 전해져 왔던 이야기들은 1950년대 불상이 발견되면서 절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절과 관련한 전설도 있다. 절골마을은 다른 마을에 반해 모기가 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곳이었다고 한다. 이는 절골마을에 있던 절의 스님이 도술을 부려서 모기를 다 쫒아 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이 절골마을이었다. 절골마을 1세대 주민들은 현재 절반이 세상을 떠난 상태다. 이 때문에 오래 전 절골마을의 풍경과 이야기는 잘 들을 수 없는 형편이다.

유 이장은 "친구들과 멱 감고, 고기도 잡으며 아름다운 경치 속 자연 그대로의 그곳에서 뛰놀던 생각이 나 아직도 가끔 꿈을 꾸곤 한다"면서 "살아왔던 그 시절만으로도 추억이 아련하다"고 회상했다. 절골마을이 거제시의 전설로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운 주민들과 유 이장은 후손들에게 항상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고 한다.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 조상들의 애환도 빼놓지 않는다고. 힘겹게 정착해 살며 평화롭게 지낸 때와 억울하게 강제 이주를 당한 이야기까지. 

▲ 2002년 마을이 사라지고 17년만에 절골마을 망향비가 세워졌다. 사진은 망향비 제막식 당시 모습.

그런 이주민들의 애환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자 2002년도 망향비가 건립됐다. 이주민들이 행정에 부탁하자 한국수자원공사에서 17년만에 망향비를 마련해 줬다. 망향비에는 이주민 중 한 명이었던 진동 시인의 시와 이주민들의 명단, 이주민들의 글이 새겨져 있다.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절골마을 이주민들은 매년 여름과 가을이면 이 망향비를 찾아 제를 지내기도 하고, 조상들과 고향을 그리워하며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몇몇은 강제 이주에 대한 울분을 아직까지 터뜨린다고 한다.

수몰되기 전 절골마을 인근은 다른 지역에서도 소풍이나 나들이로 자주 찾았을 만큼 지역 최고의 유원지였다. 자연이 만든 보물이라 불린 구천계곡의 풍경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여름이면 맑은 물과 우거진 신록이 더위를 잊게 했고, 용등봉 주변은 가을이면 형형색색의 단풍이 절경을 뽐냈다. 또 물가에는 기암괴석과 잡목군청이 비경을 이뤘다. 수정 같은 물속에는 피라미 등의 각종 민물고기가 자유롭게 헤엄쳐 다녔다. 탕근바위 벌통바위 신선바위 등과 상록군림의 조화는 그곳에서 들려오는 산새들의 지저귐까지 더해 평온함을 줬다. 절골마을 주민들은 "만약 지금까지 절골마을이 있었다면 지역은 물론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관광지로서 각광받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유 이장은 "절골마을 주민들이 고향을 잃고 흩어진 뒤 현재 구천마을에는 20가구의 이주민 중 5가구가 살고 있다"면서 "절골마을 이주민들이 모두 하늘나라로 떠나더라도 후손들이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않고 평생동안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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