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공채 5기 가수 … 거제 출신 문평일 씨

동아대 법대 3학년 때 가수로 데뷔 … 1년 만에 오아시스 전속가수로 스카우트
3회 TBC 가요대상 등 활발한 활동 … '붉은입술' 방송금지로 가수생활에 '회의'

"가수가 노래를 많이 불러야 되는데 방송을 못하게 하니 정말 갑갑했지. 그나마 쇼 공연이 많이 들어오는 가수나 앨범이라도 잘 팔리는 가수들은 나은 편이었어. 이런저런 이유로 '금지곡'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니 가수를 하지 말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지."

지난 2일 고현동 한 커피숍에서 만난 노신사의 '오래 묵은' 하소연이다. 이 하소연의 주인공은 60년대 중반 5년 가량 활동을 했던 거제 출신 가수 문평일(70) 씨다. 

문씨는 "음악이 너무 좋았어. 그래서 피아노도 배우고 기타도 배우는 등 음악공부를 나름 열심히 했어. 다니던 대학도 그만 둘 정도로 음악에 심취했지"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부푼 꿈'을 안고 무작정 서울로

문 씨는 능포동이 고향이다.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다보니 특별한 '제약'이 없었고, 소위 말하는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요건이 갖춰져 있었다.

문 씨는 "부친이 제법 규모가 있는 수산업을 하셨는데 당시 벌이가 괜찮았어. 게다가 내가 외아들이다보니 경제적인 요인 등 모든 부분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지. 노래가 하고 싶다고 해도 집에서 만류하지 않더라고. 그래서 가수의 꿈을 이루는 데만 모든 초점을 맞췄어"라고 20대 왕성했던 젊은 시절을 더듬어 기억해냈다.

문 씨는 동아대 법대 3학년 때 가수로 데뷔한다. 1965년 MBC 공채 5기 가수 공모에 응시, 당당하게 합격에 성공한 것. 5기 동기생 대부분이 작곡이나 공연 기획 파트에서 일을 하다보니 한 기수 선배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아빠는 일등병', '못 잊어서 또 왔네' 등을 부른 진송남 씨와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곡가 정풍송 씨가 바로 그들.

문 씨의 데뷔곡이 되는 '붉은 입술'을 작곡한 윤음동 씨도 한 기수 선배다. 가요계에 발을 들여 놓은 문 씨는 이듬해 서울 오아시스 전속가수로 스카우트 되면서 '주가'가 치솟는 듯 했다.

문 씨는 "당시 음반회사는 5개 정도가 유명했어. 오아시스·신세계·지구·그랜드·아세아 등 5곳이 유명했는데 그 중 최고로 꼽히는 오아시스에 전속가수로 픽업됐으니 '아! 드디어 꿈을 이루는구나'하고 생각했지. 그래서 자나깨나 노래 연습하는데만 몰두했었어"라고 당시 기쁨의 순간을 회상했다.

그리고 마침내 1966년 타이틀 곡 '붉은 입술'이 담긴 앨범이 출시된다. 당시는 가수 한 명의 독집 앨범이 나오는 게 아니라 여러 가수의 곡을 모아 앨범으로 내는 것이 유행했다.

때문에 문 씨의 '붉은 입술'이 담긴 앨범만도 여러 장이다. '초가삼간'을 부른 최정자 씨와 '사내답게 살리라'의 이상열 씨의 곡들과 묶여 나온 앨범에도 있고, '구슬픈 이야기'의 이신화 씨와 작업을 한 앨범에도 수록돼 있다. 이신화 씨는 재일교포로 '미야꼬'라는 일본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문 씨와 함께 앨범 작업을 많이 했다고 한다.

수상에 '웃고' 금지곡에 '울고'

문 씨는 66년에서 71년까지 5년 가량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 기간 중에 '사나이는 안울어', '미련이 있어', '이별은 괴로워도' 등의 노래로 제1회 공보부 주최 무궁화대상, 제1회 KBS TV 주최 고운노래 대상, 제3회 TBC 가요대상 등의 각종 상을 잇따라 수상한다.

당시는 가요순위 프로그램이 없었고, 언론사에서 인기순위를 나름대로 선정해 상을 줬다고 한다. 하지만 상을 아무리 많이 받더라도 가수는 노래를 많이 불러야 하는데 '방송 가수'로서의 길은 순탄치가 않았다.

문 씨는 "당시는 가수가 세 종류가 있었어. 방송 가수와 쇼 가수, 레코딩 가수로 나뉘었지. 말 그대로 방송 가수는 TV와 라디오에 출연해 노래를 부르는 가수였고, 쇼가수는 지금으로치면 공연 위주로 활동을 하는 가수지. 레코딩 가수는 음반 판매로 먹고 사는 가수였어. 나는? 방송 가수로는 성공을 못했어. 이유가 참 기가 막히지"라며 40여 년전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문 씨의 여러 노래들이 앨범도 많이 팔리고 인기도 얻고 했지만 문 씨에게는 이런 것들도 뒷전이었다. 왜냐하면 데뷔곡이자 타이틀곡인 '붉은 입술'이 방송금지 처분을 받게 된 것이다. 가사와 제목에 들어가는 '붉은'이라는 단어가 공산주의를 상징하며 불신과 관련된 사회 분위기를 조장하고, 특히 문 씨의 목소리가 '왜색조'라는 이유에서다.

문 씨는 "쇼 공연으로 돈도 벌고, 앨범 판매로 인기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수는 무대에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거야. 말 그대로 '라이브'를 해야 하는 거지. '생'으로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데 그 가수가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나? 게다가 타이틀곡이 방송금지 처분을 받으니 그 기분이 어땠겠어"라며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그러면서 문 씨는 "극장쇼에 나가도 다른 가수들이 당시 2000∼3000원을 받을 때 나는 1만원은 받았어. 지금으로 치면 '몸값'이 제법 된 셈이지. 하지만 방송 무대에 설 수 없다는 것이 나를 참 괴롭혔어. 그러면서 가수에 대한 회의가 많이 들기 시작했지"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방송금지'라는 당시 정부의 '무자비한 정책'에 문 씨는 씁쓸하게 가수의 꿈을 일찍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세 살 아래 현철과는 지금도 '절친' 유지 … 같은 소속사 나훈아 "선생님"이라 불러
틈 나는대로 곡 쓰는데 '마지막 투혼' … 능포청년회, 내년 목표 '노래비 건립' 추진

현철·나훈아와 '오랜 친분'은 추억으로

문 씨가 활동하던 60년대 중·후반에서 70년대 초반은 트로트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60년대 들어 기본적인 4분의 2박자의 트로트에서부터 슬로우록 폴카 맘보 트위스트 등 다양한 리듬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대중가요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65년부터 69년까지를 '트로트의 황금기'라고 칭할 만큼 트로트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다.

일본 노래를 표절했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된 1964년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필두로, MBC 10대 가수상 제1회 가수왕을 차지한 최희준의 '하숙생'(1966년), 남진의 '가슴아프게'(1967년),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1969년) 등의 곡들이 쏟아진다. 남진은 문 씨와 같은 해에 데뷔했고, 나훈아는 2년 뒤인 1967년부터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 외에도 박일남의 '갈대의 순정'(1966년), 남일해의 '빨간 구두 아가씨'(1964년), 쟈니 리의 '뜨거운 안녕'(1966년), 김상희의 '대머리총각'(1967년), 이미자의 '기러기아빠'(1969년),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1969년) 등의 노래가 나왔는데 지금도 60∼70대 어르신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노래다. 하지만 문 씨는 이런 가수들의 노래가 인기 상승 곡선을 그리며 주가를 올림과 동시에 쉬이 잊혀갔다.

문 씨는 "시작만 하면 성공할 것 같았는데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질 않더라고. 빨리 가수 생활을 접는 것도 현명한 선택일 거라는 생각을 했지.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일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짧게라도 가수 생활을 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간간이 라디오나 가요무대에서 내 노래가 나오는 것에 만족을 하고 있어. 하하하"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문 씨는 같이 활동을 하던 가수들 중에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가수들이 몇몇 있다. 그 중에서도 현철(본명 강상수)과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 사이(사실 문 씨가 3살 형이다).

문 씨는 "현철이도 인기가 없어 짐을 싸들고 부산으로 내려왔어. 현철이가 69년도에 데뷔를 했는데 남진과 나훈아에게 밀려 무명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지. 그 뒤 '현철과 벌떼들'이라는 그룹사운드를 결성해 활동을 하더라고. 조금씩 인기를 얻더니만 1982년인가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라는 노래로 솔로로 나서더니 갑자기 주가가 올라가더군. 어쨌든 잘 나가니 다행이야"라고 특별한 관계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현철 노래 중에 '청춘을 돌려다오'라는 노래 알지? 그 노래도 원래 신행일이라는 가수가 불렀어. 그 노래를 현철이가 리메이크 한 거야. 최근 근황을 물어보니 신행일이가 현철이 매니저를 하고 있더라고. 참 세상 좁은 거야"라고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훈아(본명 최홍기)와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문 씨는 "(최)홍기는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어. 같은 오아시스 전속 가수여서 친하게 지냈지. 당시 가수들 중에는 목소리만 믿고 가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 내가 피아노와 기타 등 악기를 다룰 줄 알았기에 많이 친해지려고 하더라고"라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다.

방송금지곡이 된 문 씨의 '붉은 입술'은 이후 나훈아가 본격적인 제2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인 1984년 아세아 레코드사로 소속사를 옮겨 발매한 첫 앨범에 리메이크곡으로 실리게 된다.

앨범 side-A 1번곡이 '청춘을 돌려다오' side-B 1번곡이 '유정'이었으나 side-A 4번 곡으로 실린 '붉은 입술'이 인기를 끌자 이후 추가 발매된 앨범에는 '붉은 입술'이 side-B 1번 곡으로 수록되며 나훈아의 대표곡으로 자리잡았다.

피우지 못한 꿈 노래비로

짧은 가수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거제로 내려온 문 씨는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수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뭐든 몰두하는 성격인 문 씨는 수산업에 푹 빠지면서 가수에 대한 미련도 쉽게 지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음악에 대한 애정까지는 버리지 못해 틈나는 대로 곡을 쓰고 있고, 조만간 기획사 측에 보낼 예정이다.

"고향에 내려와서도 다시 노래를 부르 라는 권유가 많았어. 그런데 한번 접고 나니까 다시 시작하기가 쉽지 않더라고. 그리고 수산업도 나름 재미가 있데. 그렇게 그렇게 일년 일년 지나다보니 지금까지 흘러온 거지 뭐야."

하지만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문 씨의 표정에는 무수한 아쉬움과 지나간 세월에 대한 희비가 그대로 묻어났다.

현재 고향 능포동 능포청년회에서 노래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능포 방파제 앞 산에 터를 닦아 내년 봄에는 건립이 될 것 같다고 문 씨는 전한다.

"꿈은 반드시 이루려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그 꿈을 향해 청춘을 불사르고, 과감히 도전하는 과정에서 이미 그 꿈은 상당 부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지. 손자·손녀 같은 청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나이 들면 아무것도 못해. 할 수 있을 때 해보고 싶은 모든 걸 해보도록 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 꿈이 이뤄지든 이뤄지지 않든 간에 그렇게 도전해봤다는 자체가 소중한 거야."

그렇게 갈무리하는 노신사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아마도 다 피우지 못한 젊은 시절의 꿈에 대해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하지만 한참 어린 '후배'들을 생각하는 '대선배'의 입가는 아름다운 곡선과 함께 행복해보였다. 지금은 거칠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가냘픈 흥얼거림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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