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평일 씨 첫 앨범 타이틀 곡 '붉은 입술' 출시 되자마자 금지곡 '족쇄'
반말·왜색·책임 전가·대통령 심기 불편 등 각종 이유로 수많은 곡 '퇴짜'

▲ MBC 공채 5기 가수 동기생들과 한 컷. 앞줄 맨 왼쪽에서 뭔가 열심히 들이키고 있는 사람이 문평일씨다(사진 맨 왼쪽). 몇년도인지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MBC 창사기념 행사에서 축하공연을 할 때 모습. 왼쪽에서 두번째(사진 가운데). 작사가 무명초(왼쪽)와의 한 컷. 무명초는 '사나이는 안울어'라는 노래에 가사를 붙였다(사진 맨 오른쪽).

'붉은입술'은 나영진 씨가 작사하고 윤음동 씨가 작곡한 문평일 씨의 1966년 첫 앨범 타이틀 곡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세상에 얼굴을 내밀자 말자 '붉은 입술'은 방송금지곡으로 족쇄가 채워지고 만다.

'붉은 입술'은 '사장'될 뻔했던 곡이었는데 훗날 나훈아가 리메이크해 방송을 타면서 60∼70대 사이에서는 인기있는 곡으로 이름을 올렸다.

60∼70년대는 군사정권과 유신체제의 국민 통제책 중의 하나인 대중문화와 출판·언론 자유의 억압으로, 정권과 조금이라도 대치되는 가수들의 노래와 각종 책들이 무자비로 갈기갈기 짓이겨졌다.

'붉은 입술'도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문 씨는 "당시는 '붉은'이라는 단어만 들어가도 금지곡이 됐다"며 "특히 내 목소리가 왜색톤이라고 해 대표곡이 방송금지곡이 되는, 어떻게 보면 내 인생에 있어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됐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의 금지곡은 방송금지번호 1호를 기록한 '기로의 황혼'이다. 금지 이유는 작사가 조명암이 월북했다는 것이다.

이후 방송윤리위원회가 1962년 6월 발족되고, 그해 11월 위원회 산하에 가요자문위원회가 생기면서 방송가요에 대한 심의가 본격화 된다.

금지곡들
가요자문위는 표절·가사 저속·왜색 등을 이유로 금지곡에 대한 '잣대'를 더욱 강화하고,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등 1965년에만 116곡을 금지곡으로 묶었다. 이듬해에도 김상국의 '껌 씹는 아가씨' 등 64곡을, 1967년에도 '방앗간집 둘째딸' 등 95곡을 금지곡으로 선정했다.

대중가요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1975년 6월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발표, 유신체제로 들어간 이후 60년대보다 더 심화된다.

정부는 공연활동의 정화대책을 발표하며 공연예술의 심의를 강화토록 했는데, 특히 대중가요에 대해서는 흘러간 노래나 최근에 나온 노래를 가리지 않고 모두 엄격한 심사를 하도록 했다.

그 중 국가안보와 국민총화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것, 외래 풍조의 무분별한 도입과 모방, 패배·자학·비관적인 내용, 선정·퇴폐적인 내용을 골라 출시된 음반까지 모두 폐기토록 했다.

그렇게 금지곡으로 묶인 곡들은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1987년 8월7일 당시 문화공보부의 '공연금지해제조치'로 대부분의 곡들이 다시 세상으로 모습을 내밀게 되지만 명함 조차 못내밀고 사장된 곡들은 셀 수가 없을 정도다.

이런 금지곡과 관련된 재미있는 책이 지난 7월 발간됐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민은기 교수가 동문·제자들과 엮은 '독재자의 노래'라는 책인데, 이 책에는 금지곡으로 지정된 노래들의 금지곡 지정 이유가 언급돼 있다.

송창식의 '왜 불러'는 반말을 한다는 이유로, 이장희의 '그건 너'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이유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조영남의 '불 꺼진 창'은 창에 불이 꺼졌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으며,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저속한 창법과 불신감 조장이라는 항목으로 금지 조치됐다.

더욱 '기막힌 이유'로 금지곡이 된 노래들도 있다. 한대수의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역시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는 '그렇다면 지금은 행복의 나라가 아니라는 뜻인가'라는 이유로 금지 조치가 내려졌으며,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느냐,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강조하면 사회에 우울함과 허무감이 조장된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담은 금지곡도 많다. 정미조의 '불꽃'은 공산주의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배호의 '0시의 이별'은 통금이 있던 시절 '0시에 이별하면 통행금지 위반이다'는 이유로 금지됐다.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된 금지곡으로는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김'이 있다. 이유는 '단신인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 씨는 대중가요의 금지 조치와 관련해 "당시 정부의 방침이 그러했기 때문에 가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로 여겼다. 말 그대로 '울며 겨자먹기'였다. 하지만 금지 조치 이유가 기가 막힌다. 이것도 안돼, 저것도 안돼 하는 식이었는 데다 가사 단어 하나만 마음에 안들어도 금지 조치가 내려졌기 때문에 제약이 너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웃음만 나온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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