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마을 노인들 모여들어…김지영 소장과 '이야기꽃' 피워

10평 남짓의 좁은 공간, 언덕빼기에 자리 잡은 20년도 훌쩍 넘은 오래된 건물…하지만 이곳 가조진료소 곳곳에는 마을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지영 가조진료소장이 진료준비를 마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할 무렵인 매일 아침 9시면 진료소의 낡은 문이 빼꼼이 열린다.  아침 찬 공기가 채 가시기도 전이지만 가조도 마을 어르신들은 삼삼오오 보건소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소장님 나 왔소, 혈압 좀 재 주이소."
"나 밤새 허리가 아파 죽갔던데 큰 병원에 가야 쓰까?"

머리가 아파서도 오고 골치가 아파서도 온다. 일이 있어서도 오고 일이 없어도 발걸음은 가볍게 진료소로 향한다. 이를테면 어르신들이 부담없이 찾을 수 있는 마을 사랑방인 셈이다.

마을에 사건(?)이 발생할 때도 어르신들은 보건소를 찾는다. 어느 집 막내 딸이 혼례를 올린다는 빅뉴스, 지난 가을 내내 허리가 아프다던 재 너머 할머니가 아들이 약을 지어줘 나았다는 얘기까지 진료소 담장 안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꽃이 피어난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한 켠에는 언제나 진료소를 지키는 김지영 소장이 있다.

"특별히 약속이 없으셔도 그냥 진료소 나오시면 동네분들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레 어르신들이 나오시는 것 같아요. 어디 안좋으신데는 없으신지, 집에는 별일이 없으신지 안부도 묻고 이야기도 나누는게 행복이지요."

서글서글한 인상과 특유의 붙임성으로 마을 어르신들의 사랑과 신뢰를 한 몸에 받는 김지영 소장. 어린 시절 할머니 손에서 자란 김 소장은 어르신들을 대하는 게 친할머니, 친할아버지를 대하는 것처럼 스스럼이 없고 친숙하다고 했다.

지난 20일은 특별히 김 소장의 방문진료가 있던 날. 특별하다고는 하지만 보건소를 찾기 힘든 어르신들을 위해 1주일에 서너번씩 의례 하는 일이다.

마을 경로당을 찾은 김 소장이 진료를 하는 30여분동안에도 할머니들은 여지없이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소장님이 어떤 분이시냐고 묻자 가조도에서 평생을 사셨다던 최말선(78) 할머니는 연신 '좋아, 좋아'를 외치신다.

"우리 소장님 참 좋아. 싹싹하고 착해. 다리가 아파 보건소에 자주 못가도 자주 집에 들여다 보면서 아픈덴 없는지 신경 많이 써 줘."

최말선 할머니의 칭찬이 이어지자 곁에 있던 다른 할머니들도 덩달아 '맞아, 맞아'라고 맞장구친다. 쑥스럽게 웃던 김 소장은 곽순이(79) 할머니에게 드시던 약이 얼마나 남았는지 꼼꼼히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른일곱살의 젊은 간호사, 김지영 소장. 그리고 순박한 가조도 어르신들의 웃음꽃이 있는 그곳이 바로 거제시보건소 가조진료소다.

 

"남편과 두 아들은 든든한 지원군"
▲ 가조진료소의 지킴이 김지영 소장은 한 남자의 아내이자 개구장이 두 아들의 엄마이기도 하다. 사진은 둘째 아들의 학습지도를 하는 모습.

김지영 소장은 거제대학 간호학과 1기 졸업생이다. 어릴때부터 간호사를 꿈꿨지만 농협 조합장이었던 할아버지의 충고에 따라 자연스레 상고에 진학했다.

"적성에 맞지 않더라구요. 집안 어르신들이 농협에 계시니까 자연스레 졸업하고 나면 농협에 취직할 줄 알았지만 공부가 영 재미가 없었어요."

김지영 소장은 운이 좋았다. 김 소장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거제대학에 간호학과가 신설된 것이다. 기회는 이때구나 싶었다. 다른 친구들이 주산과 부기를 익힐 때 수능을 준비했다. 그리곤 당당히 거제대학 간호학과 1기 입학생이 됐다.

졸업 후 마산 삼성병원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던 김지영 소장은 지난 2000년 남편인 김상진(대우조선해양 중기지원팀) 씨를 만나 다시 거제로 돌아오게 된다. 그 후로 대우병원 의무실에서 13년을 근무했다.

"아시다시피 간호사는 3교대 근무에요. 하얀 가운을 입은 백의의 천사를 상상하지만 업무 강도는 매우 높죠. 거의 막노동에 가까운 일을 10년 하다 보니 성격도 선머슴아처럼 변했고, 무엇보다 책임감이 무척 강해졌죠."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여린 외모의 김 소장은 얼핏 30대 초반의 아가씨처럼 보이지만 벌써 두 아들의 엄마다. 초등학교 5학년, 3학년 두 개구쟁이 아들은 언제나 바쁜 엄마 김 소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든든한 지원군이라고.

"어린시절 두 아들이 아토피로 고생을 많이 했어요. 일은 많지, 집으로 돌아오면 아이들은 아토피로 너무나 힘들어하지,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김지영 소장이 가조진료소로 발령을 받고 난 뒤, 작은 아들도 창호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학교를 마치면 엄마가 근무하는 진료소 방 한켠에서 한자도 익히고 그림공부도 한다.

두 아들과 남편의 사랑과 지원으로 힘들지만 행복한 김지영 소장은 오늘도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띄며 진료소의 문을 활짝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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