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밥 줘요.”평소와 달리 오늘 아침에는 유난히 막내아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응~ 엄마가 밥해 놓은 것 있지?…. 그리고 찌개 냉장고에 있으니까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고 가.”잠결에 들리던 모자간의 대화에 살며시 눈을 떠 보니, 아들은 주섬주섬 교복을 입고 있었다. 한참을 지났을까, 시계를
근 반년 가까이 나라를 시끄럽게 하던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역대 대통령 선거 중 가장 많은 후보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선거다. 선두 대열 외에는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난립했다. 향후 국가 발전을 위해 어떻게 정국을 운영하겠노라는 정책과 비전 제시가 아닌, 상대 후보의 과오와 약점에 대한 비방과 인신공격이 판을 치는 아직도 선거 후진성을 면치
장마가 올 무렵이면 수국화가 만발한다. 습기에 강하며 사찰의 정원에서 주로 자라는 크고 탐스런 꽃이다. 암술과 수술이 없으며 독특하게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식물이다.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도에 전념하는 스님들이 계신 사찰에 주로 심는다. 벌 나비가 날아들어 수정되어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스님들의 성적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꽃에 비해 불임 꽃이 사찰에 적절하
여동생으로부터 새 집을 마련했으니 한번 다녀가라는 전화를 받고 축하도 할 겸 찾아가 보았다. 좁은 집에 살다가 서른 평이 넘는 집으로 이사를 온 동생은 행복에 젖어 있었다. 요즘은 생활공간이 주로 거실이기 때문에 거실 면적을 넓게 하였고 큰 창문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뒤로는 산을 가까이하고 있어 바람이 불면 신선한 숲 향기가 날아올 것 같은 좋은 위치다. 가
댄스스포츠의 개념은 무도회에서 추는 춤이라는 의미의 볼룸댄스를 말하며, 세계 각 나라에서는 그 나라마다 민속무용이 있으나 댄스스포츠는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도법으로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춤으로 남녀가 한 쌍을 이루어서 음악의 리듬에 맞추는 가운데 신체적 움직임을 통해 예술의 미적 가치를 창조하는 스포츠라고 볼수 있다.댄스스포츠 종류는 10종목으로 라틴댄
ㄷ아파트에 산 지도 벌써 이 년이 되었다. 오랫동안 생활했던 고향이었지만, 공직으로 타향살이를 한 후에 다시 돌아와 이사한 아파트는 처음에 조금 낯이 설었으나 이제는 이웃이 피붙이같이 살갑고 편안하기 그지없다. 아내도 고향생활에 더없이 만족해 하는 모습이다.삼십육 년의 공직생활이 나와 아내의 울타리이면서도 굴레가 되기도 하였고, 그런 세월의 누적이 변화를
벗에게.진작부터 동백꽃이 붉게 뜰을 채색하고 있다네. 그 곁에 연분홍 진달래가 예쁘게 꽃잎을 내밀더니, 오늘 아침에는 노란 개나리가 시샘을 하는구먼. 알레르기 기침은 계절 바뀌는 줄을 몰라도 나무는 벌써 저렇게 봄을 맞아 나섰군 그래. 식물을 두고 어찌 감정이 없다 하겠는가. 나뭇가지에 다가서서 터트리는 꽃봉오리를 바라보는 망연함에 인생의 꽃송이가 환영으로
1950년,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한국전쟁은 한 달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고, 피난민은 거제도로 몰려왔다. 그 당시 나는 천진난만한 초등학생이었다. 베잠방이에 삼베 등지게를 입고, 소 먹이고, 냇가에서 목욕을 하면서 여름방학을 즐겁게 보낼 때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폭격기의 기관총 소리에 질겁하여 냇가 바위틈에 숨었다, 천지가 진동하는 총소리
화분을 몇 개 가꾸어 보아도 잡초가 생겨난다. 그리고 뽑아주어야 한다. 하물며 자투리 밭을 일구거나 마당과 정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잡초 제거에 고생해 보았을 것이다. 농사, 전원생활을 꿈꾸었던 많은 사람들, 나훈아의 유명한 가요 ‘잡초’에 신나 하던 사람들도 오뉴월 장마 통에 우후죽순 격으로 끝없이 번창해 가는 잡초에 필경 질리고 말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면 산책길에 나선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아침 해가 돋을 때까지 황톳길 산책로를 걷는다. 장미동산에는 아침이슬을 머금은 흰 장미, 노란 장미, 연분홍, 진분홍 장미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피어나고 있다. 넝쿨장미가 하얀 아치를 감아 기어오르며 붉은 꽃송이가 나를 보며 고개를 내밀고 있다. 넝쿨장미 터널 속을 걸어본다. 결혼식장
“미륵산에 운해가 꽉 끼이고 물아래가 컴컴한 것을 보니 오늘 비가 오것다. 야들아! 비설거지하거라.”할머니는 신기하게도 우기를 알아맞혔다. 얼마 안 가 호박잎에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륵산은 우리 집 기상관측소였다.겨울이 다가올라치면 미륵산 정상에 먹구름이 바쁘게 지나간 다음 날은 영락없이 추위가 밀고 왔다. 그럴 때
1962년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후 군에 갔다 오면, 취직 걱정이 태산이었다. 처음엔 제법 눈 높게 야망도 가져보지만 나중에 ‘면사무소 급사 자리라도……’ 하는 심정으로 나날을 보내던 시절이 누구나 있었던 시대였다. 초등학교 급사 한달 월급이 논을 한 마지기 살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1960년
등 굽은 할머니 한 분이 낡고 닳은 빈 유모차를 밀며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도로 양쪽에 턱이 있고, 시퍼런 눈을 깜박이며 시간을 재촉하는 신호등, 그리고 짜증스런 운전자들의 기대를 맞추기는 애초부터 글러 보인다. 때마침 스산한 늦가을 바람이 거리에 떨어진 가로수 낙엽들을 우수수 휩쓸고 지나가는 배경이 힘겨움과 무안함에 기다리는 차들을 향해 손을 두어 번
분명 내가 첫사랑이었을 그 첫 키스의 아카시아 언덕에서 놀고 있는지. 하루에도 두세 통씩 배달되던 봉함 편지의 개봉으로 설레이고 있는지. 첫째 둘째 아기를 안고 공원행 만원버스에서도 즐거워하던 옛일, 떠올리고 있는가. 하루 일상이 반쯤 나로 인해 정신이 없었을, 아둔한 나의 고집에 그대의 청순함에도 한계가 지났을 세월들을 뒤로하고 그대 꿈꾸고 있는가! 청보
아침에 사우나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없었다. 이 시간쯤이면 아침 운동을 마치고 와서 식사준비를 하고 있을 때인데, 핸드폰도 그대로 있는 걸 보면 잠시 어디 갔겠지 하고 한참을 기다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길한 예감이 스친다.전화가 걸려왔다. “윤○○씨 가족 되시죠. ○○병원인데요. 교통사고가 났으니 응급실로 빨리 오십시오.”라
올봄 개인전 준비로 몇 달을 작품과 씨름하였다. 무사히 도자기 페인팅 전시회를 마치고 얼마 지나 집으로 꽃바구니가 배달되어 왔다.반갑게도 일본에 사는 후지타 유코상이 보내온 것이었다. 전시회를 마치고 보냈던 리플릿을 보시고 미리 알려주지 않아 많이 섭섭했다는 카드 한 장과 붉은 장미 속에 내가 좋아하는 커다란 나리꽃을 중앙에 꽂아 보내온 것으로 봐 분명 특
이리 가을이 깊어지는 계절에 서면 여러 가지의 추억들이 자주 떠오르곤 한다. 그 잊지 못할 기억 중에서 딱 두 가지만을 골라 글로 올리려는데, 너무 개인적인 글인 것 같아 죄송한 마음으로 여러 문우님들이나 선배님들에게 먼저 양해를 올리고 시작한다.#1. 길(1969년)대부분의 선생님들이 그러하시지만, 나도 초임의 선생 시절을 잊지 못하고 있다. 아니 세월이
3월22일. 광안리 분도 수녀원으로 부활 자정미사를 드리러 갔다. 신부님이 부활초에 불을 붙일 때까지 우린 한동안 어둠 속에서 까만 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봉헌하는 수도자들의 미사는 성스럽다. 왠지 숨 쉬는 것도 조심스러워진다. 평소 한 시간이면 미사는 족하지만 부활 자정미사는 제7독서까지 있어 장장 두 시간이나 걸렸다. 동행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창원에 있는 예식장으로 간다. 4월의 거리는 온통 벚꽃이다. 벚꽃처럼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날 신부 민경이 어릴 적 생각에 잠긴다. 민경이는 우리 반에서 제일 키가 작고 공부도 청소도 잘하였을 뿐 아니라 매일 선생님의 책상 위에 요구르트 한 병을 올려놓고는 목이 마를 때 마시라고 하던 착한 아이였다.어느 날 가정 방문을 하게 되
무릎 연골 파열로 수술을 위하여 병원에 입원하였다. 7월의 무더운 여름날 거제 산방산 비원의 낮은 언덕을 내려오다 발을 헛디뎌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았던 무릎이었다. 그러고도 여행의 유혹을 못 이겨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면서 물리치료로 대충 땜질하고 절뚝거리며 백령도, 울릉도, 독도, 선유도를 다니다가 결국 서울의 신월동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