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거제면 오수리 죽림포 마을에 곤발네 할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대숲개’는 대나무 죽(竹)과 수풀 림(林) 그리고 바닷가를 나타내는 포(浦)로 죽림포의 예 지명입니다. ‘곤발네 ’는 마을사람들이 불렀던 택호로 젊었을 때 남편이 돌아가시고 혼자서 가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70살이 되었던 1885년
거제시 둔덕면 학산마을은 지금의 해군사령부와 같은 삼도수군통제사영의 선봉아문(先鋒衙門)인 진(鎭)이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과 관청의 병사들은 서로 도와가며 지냈습니다. 해마다 음력 정월 초순이 되면 농악대가 마을당산과 관청ㆍ마을우물ㆍ큰 다리ㆍ마을 이곳저곳 중요한 곳을 돌면서 아무 탈 없이 편안하고 풍년이 되게 해달라고 고사를 지냈습니다. 당시 학
“엄마, 배고파요. 먹을 것 좀 주세요.”집에 쌀과 보리가 다 떨어진지 오래입니다. 이제는 뒷산에 가서 풀뿌리를 캐어다 죽을 쒀 먹었는데 오늘은 뭘 먹을지 걱정부터 앞섭니다. 아이는 자꾸 배고프다고 보채고 먹을 건 없고 바다라도 나가야 될 것 같습니다. 바닷물이 나자마자 굴쪼시개를 들고 바다로 나갑니다. 뒷집 영이네도 앞집 철수네도 건
조선시대 옥포 앞 바다에는 대구와 청어가 많이 잡혀 임금님께 진상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 대구와 청어가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임금님께 진상할 고기는 정해져 있는데 고기가 잘 잡히지 않자 배 주인의 걱정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왜 고기가 많이 잡히지 않을까?' 배주인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뱃일을 하는 사람들 끼리
"불이야, 불!""세진암에 불이 났다!""아이구, 이일을 어쩐담, 세진암에 불이 나다니!""저런, 어쩌다가 불이 났지?""글쎄 절에 빈대가 많아 빈대를 태워 죽이려다가 불이 났다더군!""설마, 그럴 리가 있나?" 거제 사람들은 '현재 남아있는 오래된
"돌판의 머리를 장좌마을 쪽으로 향하게 하시오.""아니오, 지석마을 쪽으로 돌려놓으시오. 장좌마을 쪽으로 머리가 향하면 우리 장좌마을이 망합니다.""지석마을 사람들 힘냅시다. 지석마을의 평안과 발전을 위해서는 돌판의 머리를 반드시 장좌마을 쪽으로 해야 합니다.""절대 안되오, 돌판의 머리를 지석
"아! 고향 떠난 지 얼마 만에 돌아온 것이냐?""어휴, 그 못된 왜구들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원. 이제 절대 왜구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텐데"왜구란 우리나라 연안에서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 해적을 말하는데, 고려 말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너무 심해 거제사람들은 거창 가조현으로 피난을 떠나
거제현 관아가 2007년 국가지정문화재가 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본 경민이는 역사를 전공한 삼촌을 졸라 거제관아가 있는 거제면으로 출발했습니다. 거제면은 한때 국방의 중심지로 거제 7진을 관리하던 곳입니다. 거제 7진은 영등포·장문포·조라포·옥포·율포·지세포·오 아포(가배량진성)로 왜구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불로초를 얻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믿고 있는 신하 서복(徐福 또는 서불)을 불러 이르기를 “예로부터 거제 해금강에는 신비한 약초가 많아 약초섬으로 불리고 있다고 하니 그대가 가서 나를 위해 불로장생초를 구해오도록 하시오” 불로장생초란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신비의 약초를 말합니다.&ldq
거제군은 조선 고종 때 경상남도 거제군으로 승격되었으나, 1918년 3월18일 용남군·진남군·거제군을 합쳐 통영군으로 했다가, 1951년 거제군 설치법에 따라 다시 거제군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거제군의 이름을 도로 찾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거제군청을 장승포에 둘 것인가 아니면 고현에 둘 것인가를 두고 두 주장이 팽팽히 맞서다가 결국 대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4시,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북한군이 갑자기 침략을 감행했기 때문에 우리 국군은 막아낼 틈이 없었습니다.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계속 후퇴를 거듭하면서 온 나라가 공산군의 손에 함락 당할 정도로 위험에 빠졌습니다. 창원·고성·통영까지도 공산군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거제는
1910년, 일본이 강제로 우리나라를 빼앗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황금어장인 거제의 바다는 모두 일본인들이 주인 노릇을 했습니다. 어민들 뿐 아니라 농민들도 이런저런 핑계로 농토를 빼앗겼지만 나라 없는 백성은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이 없었습니다.1919년 4월 3일우리 고장 거제에서도 나라의 독립을 외치는 함성이 불같이 일어났습니다. 3월 1일 고종황제의
임진왜란이 있은 지 300년이 지난 뒤에 일본은 또다시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했습니다. 1894년 청나라와 일본과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겼습니다. 우리나라 땅에서 청나라의 세력을 몰아낸 일본은 다음으로 러시아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전쟁준비를 하게 됩니다.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러시아가 눈에 가시였고, 러시아도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니
이순신 장군 때문에 왜군은 바다에서 전투 때마다 패하자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무시무시한 꾀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일본사람으로 조선에 귀화한 요시라라는 사람은 우리의 정보를 빼가는 이중간첩이었습니다.당시 우리나라의 최고 사령관 권율 장군에게 요시라는 비밀문서를 보냅니다. "가등청정이 다시 군사를 모아 쳐들어 올 것이니 그때
왜군은 육전에서는 계속 이겼지만 반면 해전에서는 싸울 때마다 한 번도 이기지 못하여 전선 및 병사의 손실이 막대했습니다. 그들은 남해 연안을 시작으로 서해바다를 우회하여 한강 보급로를 확보하려던 계획에 큰 차질이 빚게 되었습니다.조선의 내륙지방은 조령, 추풍령 등 험준한 산악이 많아 군수품 보급로로는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서해로 잇는 바닷길을 확보하려 했으
일본의 권력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시키자마자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얼토당토않게도 ‘명나라를 치려 갈 테니 길을 비켜 달라’고 트집을 부렸지만 나라에서는 들어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이를 빌미로 조선 선조임금 때인 1592년 4월 13일 저녁 7시, 20여만 명의 왜군을 앞세워 갑자기 우리나라로 쳐들어 왔습니
고려시대 중기부터는 나라의 이름 있는 인물들이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서 거제도에 내려와 살게 되었습니다.고려 의종임금 때 학자 정서는 의종이 왕이 되기 전에 의종의 아우를 왕으로 삼으려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썼습니다. 의종 5년(1151년) 고향인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의종 12년(1158년) 거제도로 유배되어 12년간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그때 의종은 머지않
거제는 섬이긴 하지만 육지나 다름없는 큰 섬입니다. 섬이 큰 탓에 농사를 많이 지었고,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어업도 크게 발달했습니다. 그런 탓에 거제는 먹을거리가 풍성한 섬이었습니다.신라 때는 서울인 경주가 가까운 탓에 거제를 잘 지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때는 서울을 개경(지금의 개성)으로 옮겨감에 따라 나라의 힘이 거제까지 미치기에는 거리가 너무
거제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사냥을 하거나 아니면 벼나 보리 등 농사를 지으며 살던 때입니다.거제의 서쪽인 거제면 법동리에 '산달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산달도는 세 개의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고 그 사이로 달이 뜨면 그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산달도에 가면 '후등패총'이라고 부
1974년 2월16일 지방기념물 제9호로 지정된 사등성은 둘레 986m 높이 3m로 평지에 축성된 옹성(甕城)이다. 사등성은 삼한시대 변한 12개국의 하나였던 두로국(瀆盧國)의 왕도지 였던 사등면 성내리에 축성된 읍성역할을 했다. 지형적으로 볼 때 명당지다. 계룡산 지맥이 오른쪽으로 사곡 뒤로 뻗어있고 백암산과 망산이 감싸고 있는 조용한 항구 사월포 안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