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정군자 낚시하기하루는 제자들이 찾아와 "선생님, 날씨도 덥고 하니 구천동 용듬벙에 가서 낚시나 해서 시원한 매운탕이라도 끓여 먹읍시다" 하고 말했다. 정군자는 방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가 "그것 참 좋겠네. 나는 잠시 보던 책을 마저 보고 뒤따라 갈 테니 먼저 가서 고기를 낚게"라고 말했다.제자들이 구천동 용듬벙에
하나. 정군자 산삼캐기앉아서도 천리를 보고 하룻밤에도 몇 천리를 다녀올 수 있다는 신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정군자라 불리는 사람이 거제 명진에 살았다. 하루는 그의 형님이 와서 "동생,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기력을 다 잃었는데 인삼이라도 고아 드렸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고 의논해 왔다."형님, 그러면 구하러
거제 수월골에 옥범좌수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성은 옥(玉)씨였고, 아는 것이 많고 꾀도 많은 탓에 사람들은 좌수(座首)라고 높여 불렀다. 옥좌수의 눈을 보면 그 눈동자에 범이 보인다 하여 '옥범좌수'가 되었다. 거제 땅에서는 말로나 꾀로 아무도 옥범좌수를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옥범좌수는 나라 구경을 해 보겠다고 부산포로 해서 경주에 갔다. 배포가 큰
듬벙'은 '웅덩이'의 지방말로 우리 조상들이 가뭄에 대비해서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작은 저수지를 말합니다. '용듬벙'에 대한 설화는 사등면과 연초면,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문동쪽으로 올라갈 때 오른쪽 계룡산 아래 있는 용산마을에도 용듬벙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세 곳의 이야기가 모두 비슷한 내용으로, 사등 용듬벙은 명주실 끝에 돌을 매
거제 동부에 사는 팔십된 노인이 죽기 전에 강원도 금강산 구경이나 하자고 길을 나섰다. 세상에서 가장 좋다고 소문난 금강산이지만 동부노인은 생각만큼 마음에 들지 않아 반쯤 올라가다가 되돌아 내려오는데 어떤 노인이 정자에 앉아 있었다."금강산이 좋다고 해서 왔는데 별 구경거리가 되지 않아 돌아가려고 하는데, 혹시 어디 좋은 곳이 있으면 알려주시오&q
먼 바다에서 학동마을을 바라보면 노자산과 가라산이 양쪽 날개를 펴고 바다를 향해 날고 있는 학(鶴)을 닮아 있는 형국이다. 산 아래로 뻗어 있는 학동 뒷산이 학의 머리에 해당하기 때문에 학동이라는 마을이름이 생겨났다.학동마을 바닷가는 약 1.6km의 해안선인데 여기에 흑진주 같이 검고 고운 몽돌이 지천으로 깔려 있고, 오른쪽으로 십리 길에는 자연산 동백나무
동부면 거제자연휴양림을 지나 조금 오르면 고개가 있는데 여기가 학동고개다. 노자산을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고, 학동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으로 1월 1일 아침이면 해맞이 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지금은 도로가 놓이고 차로 다니기 때문에 걸어서 갈 일이 별로 없지만 차가 없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모두 이 고개를 걸어서 넘어 다녔다.그런데 이 학동고
갈곶이 더덕남부면 갈곶이 해금강은 빼어난 절경으로 남방의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린다. 해금강의 본래 이름은 갈도(葛島) 곧 칡섬이다. 산 중에 어른이라는 노자산(老子山) 정상에 올라 보면 산 준령이 칡넝쿨처럼 뻗어 있는데 그 뿌리에 해당되는 지점이 해금강이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노자산과 가리산이 용의 몸이라면 갈곶이는 용의 입모양이고 해금강은 여의주를 닮
북병산 줄기를 따라 내려오다가 망치고개를 지나 구조라 해수욕장으로 가기 전의 바닷가 쪽으로 작은 섬이 하나 보이는 데 이 섬이 윤돌섬이다. 이 섬에는 효자아들의 애틋한 사연이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아주 오랜 옛날 이 섬에 윤(尹)씨 성을 가진 과부 노파가 아들 삼형제와 살고 있었다. 섬에서 조금 떨어진 북병산 아래 양지마을에는 늙은 어부가 살았다. 늙은 어
옥녀봉 줄기가 굽이쳐 장승포항을 감싸고 돌아 능포 앞바다에서 우뚝 멈추고 선 곳에 괴이하게 생긴 바위가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이곳이 양지암이다. 거가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장승포에서 부산 가는 여객선이 항구를 조금만 벗어나면 마치 군함같이 생긴 바위가 머리를 쑥 내밀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 부른다.샛바람이 불어 거센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며
거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 사이의 좁은 해협이 견내량입니다. 1971년 거제대교가 놓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룻배를 타고 통영과 거제를 오고갔던 뱃길로 육지에서 섬으로 들어오거나, 섬에서 육지로 나가야 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 중심지였습니다. 불과 300m 정도의 좁은 폭이지만 물살이 거센 탓에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크게 승리한
지금의 상문동은 본래 신현읍이었을 때 상동리와 문동리였는데 둘을 합쳐 동(洞)이 됐습니다. 상동마을은 대동 피렌체아파트가 있는 그 부근입니다. 옛날 상동마을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우는 부모와 형을 생각하는 착한 동생이었지만 형은 동생과 다르게 욕심이 배 밖으로 나올만큼 자기밖에 몰랐습니다.어느 날 동생이 계룡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지게를 받쳐
사등면 청곡리 앞 바다에는 마치 여인의 가슴처럼 두 개의 섬이 나란히 떠 있습니다. 이 섬을 사람들은 '형제섬'이라 부르는데 섬에 얽힌 전설에는 따뜻한 두 형제의 우애가 담겨져 있습니다.옛날, 사등면 청곡마을에는 두 형제가 홀로된 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해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형제는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할 뿐 아니라 형과 동생사이의 정이 얼마나 두
"산신령님, 저의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저는 고려 18대 의종왕입니다. 그런데 저는 무신(武臣) 정중부(鄭仲夫)의 반란으로 인해 이곳 거제도 둔덕면 거림리의 우두봉 밑으로 피해왔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와보니 우리의 힘으로는 성(城)을 도저히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는 성이 필요합니다. 신령님! 성을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거제시 연초면 연사리 효촌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효촌마을은 '효자문'으로 불렀던 마을로 연초초등학교에서 맞은편으로 보이는 마을입니다.이 마을에 효심이 지극한 이돌대(李乭大)라는 청년이 살았습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가운데도 어머니를 위하는 마음이 너무나 지극하고 뛰어나 마을 사람들은 모두 효자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어머니가 병이
사회가 혼란스럽고 살아가기가 힘든 세상일수록 사람들은 우리를 구원해 줄 영웅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큰일 났어, 세상살이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어떻게 산단 말인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우리가 불쌍해. 어서 빨리 세상을 구해 줄 영웅이 나타나면 좋을텐데."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고 있었지만 기다리는 영웅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
"내가 아무래도 더 살지는 못하겠구나."아버지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고생하시다가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아들을 앉혀놓고 유언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설마 이 넓은 거제도 산천에 아버지 병환을 낫게 할 약이 없겠습니까? 아버지를 낫게 할 약을 구해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병으로 자리에 누운
아주당(鵝洲堂)은 거제시 아주동과 아양동 사이 산 언덕배기에 있던 당집으로 자신을 사랑해 준 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밤새 지네와 싸우다 죽은 두꺼비의 넋을 위로해 주던 곳입니다. 당이 있었다하여 마을 이름도 '당 고갯길'이라는 뜻으로 '당목(堂項)'이라고 불렀고 산 이름도 당등산(堂嶝山)입니다.거제는 지금부터 약 1350여 년 전 신라문무왕 17
거제시 장목면 시방마을에서 바라다보면 바로 맞은편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섬 하나가 바다 위에 떠 있습니다. 이 섬이 '물(水)이 사람을 이롭게(利) 하는 섬'이라는 뜻을 가진 이수도(利水島)인데 한자어 이름을 갖기 전까지는 이물섬이라 불렀습니다. 이름에서 보듯이 가뭄 때는 바다 건너 이웃마을에서 물을 길러 올 정도로 물이 풍부한 마을이었고, 비록 작은 섬
둔덕면 상둔리 옥동마을 앞산에 있는 장등산 정상 부근에 둘레가 50m나 되는 우뚝 솟은 큰 바위가 있습니다. 이 바위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두 조각으로 갈라져 있는데, 거제 사람들은 이 바위를 벼락 맞은 바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옛날 신라시대 때의 일입니다. 사람들은 명주옷을 좋아했기 때문에 산에서 따온 뽕잎으로 누에를 길러 옷감을 만들었습니다. 옥동마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