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담 스님/금수사 주지

먼저 수행이 깊으신 高僧大德, 학문이 깊으신 석학들께서 나무라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움이 짧은 재가불자로서 평소에 생각하던 바를 쓰면서 움츠러 드는 마음으로 송구함을 표합니다. 또한 제 표현 중에 잘못된 부분이나 내용이 있으면 준절한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삼법인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 사성제 팔정도와 12연기를 설명하셨는데 3법인은 그 내용의 진수라 할 것입니다.

삼법인은 세가지의 불변의 진리라는 뜻입니다. 중생이 잘못된 견해에 빠지지 않도록 인간과 사물의 실상을 밝혀주셨기 때문에 마치 진리의 인장과 같다고 하여 삼법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삼법인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세 가지를 일컬으며 견해에 따라서는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더하여 사법인이라 부르기도 하고 열반적정 대신 일체개고를 포함시켜 삼법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삼법인을 이해하는 것이 수행자로서 깨달아야 할 사성제 팔정도의 지름길이라고들 흔히 말합니다. 왜냐하면 삼법인의 이해가 팔정도 중 바른견해(正見)를 갖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첫째가 제행무상입니다. 諸行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말하는데 동식물이나 생·무생을 가리지 않으며고. 하등을 따지지 않습니다. 諸行無常이라 함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포함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빠르게 변화하며 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오늘도 출근해서 일하고 있지만 어제의 내가 아니며 수년 전에는 어떤 이들의 자식이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어제 죽은 이들에게 오늘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생멸하고 변화하고 會別을 반복하는 것을 제행무상 이라고 합니다. 그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지나친 탐착을 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흔히들 무상을 허무한 세상사라고 단정짓고 자포자기의 자세가 마치 부처님의 가르침인 양 착각하여 그런 세계로 빠져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악취공이라 하며 수행이 상당히 깊으신 분들도 간혹 빠져드는 깊은 수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이것은 결코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며 오히려 제일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제행무상은 희망과 행복의 메세지도 동시에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불행 끝에 낙이 오고 추운 겨울이 지나면 생동의 봄이 옵니다. 부모는 늙어 가지만 아기는 자라서 성인이 되고 다음 세대를 이어 갑니다.

멸이 새로운 잉태나 창조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러한 선순환의 진리를 이해한다면 언제나 희망과 기쁨을 갖을 수 있을 것입니다.

諸法이라 함은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인식 할 수 있는 일체의 모든 대상을 말합니다. 제행무상에서의 제행과 같은 의미로 보아 무방합니다.

‘제법무아’란 이 세상의 어떠한 현상이나 사물도 다른 현상이나 사물과 관계를 맺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나 몸 또는 나와 관계되는 그 어느 것도 온전한 내 것이거나 나의 본질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즉 고정불변하는 참된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내 몸의 어느 부분이나 내가 입고 먹는 모든 것이 온전한 나의 것이라 할 만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연에 의해서 내몸에 자라나서 언젠가는 연에 따라 흩어질 것입니다.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함은 연기법과 무상과 무아를 깨달아 모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사라지고 나면 지고 (至高)의 안온과 평화와 고요가 피어나서 다툼과 분별과 나뉨이 없는 완전한 평화와 고요의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을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내 보이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생동의 봄을 맞이하여 우리가 지나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조금만 더 낮추고 나누고 이해하고 노력한다면 더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이 될 거라는 믿음을 가져 보면서 모두의 마음 속에 아름다운 꽃 한 송이씩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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