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시대 변한 12개토후국 중 독로국은 사등에 왕도를 정해 대리 뒷산에 천신제를 지내는 소도를 정하고 군장을 다스렸다고한다. 가락건국으로 육가야와 포상팔국을 두었는데 거제는 독로국이었다.

이후 신라문무왕 상군이라 했고, 신문왕때는 상주군이라 개칭하고 금녕도호부 관하 해상방어진 축성계획에 따라 사등성을 축성하고 동쪽 초석에 상주(尙州)라 조각했다. 이는 1974년 2月 16日 지방기념물 제9호로 지정돼 있다.

사등면은 거제도의 서부 관문이고 한려수도 교통의 중심인 성포항이 있으며 사암의 사양토질 농지로 밭(田)이 47%인 433㏊나 돼 거제시 평균 35%에 비해 모래땅이 많다.  사등면(沙等面)의 이름도 이에서 비롯됐다.

⊙ 덕호리
조선 영조 때 왜성방 이었으나, 고종 때 덕호리가 됐다. 고쳤으며 1942년 5월 1일 부락구제로 광리와 견내량의 2구가 됐으며 1961년 10월 1일 행정리로 바뀌고 1971년 4월 8일 거제대교가 개통됨에 따라 신촌(新村)마을이 신설됐다.

○ 광리(廣里)마을 =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한려수도의 관문에 토성을 쌓아 왜성이라 했는데 넓은 등성이 들판이라 번득이라 하여 광리 마을이 됐으며 육지와의 바다 560m에 거제도로 오는 송전탑이 있다.

○ 견내량(見乃梁)마을 = 통영반도와 거제도사이 560m를 바라보는 곳으로 고려 의종 24년(1170) 정중부의 경인란으로 왕이 거제도로 추방돼 오면서 건넜다하여 전하도라 불렀으며 선조 25년(1592) 7월10일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이 왜선 30여척을 격파한 후 나룻터가 생겼고 1950년 11월 27일 UN군이 거제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면서 차도선장(車渡船場)이였다가 1971년 4월 8일 거제대교의 개통으로 육지가 됐다.

○ 신촌(新村)마을 = 구 거제대교옆에 통영과 거제시내버스의 정류장 설치와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 새마을이 형성돼 신촌마을이 탄생됐다.

⊙ 사곡리(沙谷里)
영조 45년(1769) 방리 개편으로 두동방에 속하는 모래실의 갯마을이었으나 고종 26년(1889) 두동리로 됐다가 1915년 6월 1일 사곡리로 법정리가 됐고, 1942년 5월 1일 부락구제로 사곡과 두동의 2구가 돼 1961년 10월 1일 행정리가 됐다.

○ 사곡(沙谷)마을 = 팥골의 북동쪽 갯마을로 앞바다가 얕아 모래가 많으므로 모래실이라 했는데 한자로 사곡이 됐다.

○ 두동마을 = 본래 두동방이였으니 밭이 많아 팥골이라 했는데 두동마을로 했다.

○ 가암밭골 =  팥골 서쪽 집넘개 서쪽에 있는 골짜기다.

⊙ 사등리(沙等里)
영조때 방리 개편으로 사등방이었으며, 고종 26년(1889) 사등과 성촌리로 분리됐다가  다시 합치고 1915년 6월 1일 사등리로 법정됐으며, 1942년 5월 1일 부락구제로 성내, 언양, 대리, 금포의 4구로 돼 1961년 10월 1일 행정리가 됐다.

○ 성내(城內)마을 = 신라 신문왕 금녕도호부 관하 거제를 상주군이라 하고 해상방어의 축성계획에 따라 사등성을 쌓았던 성안 마을이다. 현재 지방기념물 제9호로 지정돼 일부 복원 보존하고 있다.

○ 언양마을 = 사등리의 서남쪽 개금치 밑 양지바르고 앞에는 큰 사등평야가 펼쳐 있으니 언양이라 했다.

○ 대리(大里)마을 = 사등성의 서쪽 망치산 자락에 있으니 본래 건너몰이라 했는데 성을 쌓은후 군함정을 지어 수군을 훈련시켰고 임진왜란후 창녕조씨가 들어와 경원제와 정충사를 세워 큰 마을이 됐으니 대리라 했다.

○ 금포(金浦)마을 = 사등리의 북서쪽 성포리와 경계에 꽃밭등이 길게 뻗어 북서풍을 막아 방파제 구실을 했으니 석개라 하여 사등성의 수군을 보호했고 뒤의 망치산에 철광이 있어 쇳개라 부르기도 하여 금포라 했다.

○ 개금치 = 언양마을 건너 중통골에서 둔덕면 상둔리로 넘어가는 가파른 큰 고개로 깨금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는데 옛날 밤늦게 넘어가는 길손이 깨금을 따서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는데 밤늦게 돌아오는 길에서 도깨비를 만나자 깨금을 이빨로 깨무니 딱하는 소리에 도깨비가 도망갔다는 전설의 고개이다.

⊙ 성포리(城浦里)
영조때 방리 개편으로 사등방에 속했으며 고종때는 사근리(沙根里)가 분리됐다가 다시 내사(內沙)와 사근리(沙斤里)로 나뉘고 고쳤는데 1915년 6월 1일 도령 제20호로 성포리가 법정리가 됐으며 1942년 5월 1일 부락구제로 성포와 사근의 2구 돼 1961년 10월 1일 행정리가 되고 1968년 항도마을이 신설됐다.

○ 성포마을 =  본래 내사리(內沙里)에 속하는 북쪽 갯가에 선창의 포구가 있었는데 부산과 마산, 통영의 항로가 발전돼 항구마을이 형성됐으며 사등성과 포구의 뜻으로 성포라 했다.

○ 사근(沙斤)마을 = 고종때 사근리(沙根里)라 칭한 이유는 사등을 중심으로 사곡(沙谷)은 모래실의 모래골이고, 사등은 모래같은 사양토질이며 사근(沙根)은 맑은 모래의 근원지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사근마을은 옛날의 내사리(內沙里)인 윗사근과 바닷가의 아랫사근이 합친 것이다.

○ 항도(項島)마을 = 성포의 동쪽에 있는 섬인데 민물때는 섬이고 썰물때는 걸어 다니는 장구 모양의 목이 있어 목섬이라 했으나 이 목을 매립하여 멸치 어막이 있었고 지금은 조선소가 있는 마을로 1968년 신설했다.

○ 가도(駕島) =  성포항의 서북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멍에 모양으로 일명 멍에섬이라 하며 면적이 7,438㎡이고 옛날 멸치 어장막이 있었다.

⊙ 오량리(烏良里)
영조때 방리 개편으로 오양방이었는데 고종 때 오량과 신계리 나뉘었고 1915년 6월 1일 오양리로 법정됐으며 1942년 5월 1일 부락구제로 오량과 신계의 2구가 돼 1961년 10월1일 행정리로 됐다.

○ 오량(烏良)마을 =  연산군 때 오양보(烏壤堡)와 역을 두었는데 거제현('고현':巨濟縣)과 고성현(固城縣)의 동서 40리 거리에 있는 중간지점이고 한려수도의 견내량목에 위치하여 넓은 들 고운 흙의 평지에 까마귀가 찾아오는 오양방이었으나 제107대 통제사 조경의 선정비를 역리와 주민이 세우니 착하고 어진 통제사를 상징하여 오량리로 고쳤다.

○ 신계(新溪)마을 =  오량성의 서북쪽 오량천 건너에 남향으로 따뜻한 새 마을이 형성돼 신계라 했다.

⊙ 지석리(支石里)

○ 지석(支石)마을 =  선사시대의 고인돌 무덤이 지석방의 서남쪽에 세개가 있었기 때문에 지석이라 했으며 1913년 처음으로 사등면사무소를 사등리에 두었는데 1919년 지석마을에 옮겼다가 1936년 성포리로 옮겼다.

○ 장좌(將佐)마을 = 지석마을 남동쪽 골짜기에 윗장자골과 아래 장자골의 두 촌락이 있는데 가파르고 좁고 깊숙하여 옛날 장자라는 사람이 은거하여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또한 임진왜란때 장군이었던 수성빈씨가 입주하여 살고 있는 마을이라 장좌(將佐)라 했다고 하며 그의 묘는 둔덕면 거림리 막하터 뒷산에 빈정승묘라는 큰 묘가 있다.

○ 개간지마을 =  장좌골에서 언양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옛날에 큰 길이었는데 그 산지를 개간하여 산골마을이 형성됐다.

⊙ 창호리(倉湖里)

○ 창외(倉外)마을 =  가조도의 남단 성포항과 마주보는 나루터가 있어 진두라 했으며 섬의 중심에서 밖이라 하여 창외라 했다.

○ 신전(莘田)마을 = 가조도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초원이 풍부하여 섶밭이라 했는데 신전(莘田)으로 했다.

○ 창촌(倉村)마을 = 가조도의 서쪽에 위치하며 옛날 가조도 목장이 있을때에 창고가 있던 곳으로 창촌(倉村)이라 했다.

○ 실전(實田)마을 = 가조도의 중앙으로 옥녀봉 남쪽에 위치하여 본래 실밭개라 했고 광이바다의 어업기지였으며 가조출장소가 있는 마을이다.

○ 유교(鍮橋)마을 = 가조도의 북동단에 위치하여 대구의 풍어로 어린이도 엽전을 가지고 다니는 잘사는 갯마을이고 옛날 아랫마을과의 사이에 쇳다리를 놓았다 하여 놋다리라 전래돼 유교라 했다.

○ 신교(新橋)마을 =  놋다리 북쪽 아래 놋다리 마을을 분리하면서 신교라 했다.

○ 군령포(軍令浦)마을 =  가조도의 남동쪽에 위치하여 한려수도의 깊숙한 포구로 임진왜란때 우리 수군이 머물면서 군령을 받았다는 갯마을이다.

○ 계도(鷄島)마을 = 가조도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앞받에 닭모양의 닭섬이 있으니 본래 닭섬개 또는 닭섬몰이라 하여 계도마을로 했다.

⊙ 청곡리(靑谷里)

○ 청곡(靑谷)마을 = 본래 고인돌이 있는 지석방에 속하고 있었으나 분리되면서 청초산 밑이고 구석촌 골짜기로 청곡이라 했다.

○ 청포(靑浦)마을 = 본래 서갈곶이 또는 부평이라 했는데 청초산의 서쪽이고 부평산의 서쪽이고 부평산밑 갯가마을이라 청포라 했다.

○ 갈곶이 마을 =  청포의 서쪽 땅끝이 튀어나온 곳이라 본래 서갈곶이라 했고 거제도의 해금강을 동갈곶이라는 동서의 상대적인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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