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호 창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그것은 이제까지 어느 집단에도 소속당하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해 왔던 그가 과거의 그릇된 관념을 포기하고 인간 집단에 귀환하리라는 것을 알려 주는 징표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석방포로 이명준이 인천항을 떠나 제삼국으로 향하던 타고르 호 선상에서 비로소 현실 속에서 환상(관념)만 추구했던 과거와 결별하고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구체적인 삶을 살고자 결심한 것인데, 그 매개가 갈매기(환상)였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명준의 남지나해에서의 자살과 함께 갈매기가 사라졌다는 결말은 매우 도식적이기는 하지만, 그의 죽음의 의미를 명징하게 드러내 준다. 즉 이데올로기보다는 가족공통체의 사랑이 앞선다는 명제가 그것이다. 이것이 소설 『광장』이 추구하고자 했던 진정한 주제이다.

■남한의 체제를 선택한 거제도포로수용소 반공석방포로들의 삶과 문학
② 석방포로인 아버지에 대한 아들 민홍의 추억 - 김소진 의 단편소설 「쥐잡기」 -

다음은 남한 체제를 선택한 반공석방포로들의 석방 이후의 삶을 다룬 작품들을 살펴볼 차례인데, 이 자리에선 젊은 나이로 일찍 돌아간 소설가 김소진의 작품들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작가 김소진은 1963년 강원도 철원에서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처자식을 두고 함남 성진에서 남으로 온 피난민인 아버지와 철원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을 서울에서 보내고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1990년부터 한겨레신문사 기자로 지냈으며,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쥐잡기」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작품집에는 첫 작품집 『열린 사회와 그 적들』(1993), 두 번째 창작집 『고아떤 뺑덕어멈』(1995), 세 번째 창작집『자전거 도둑』(1996) 그리고 연작소설집 『장석조네 사람들』(1995) 그리고 그의 사후 편집되어 나온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2006) 등이 있다. 그는 1993년 소설가 함정임과 결혼한 뒤 1997년 췌장암으로 34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처럼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작가 김소진은 피난민 아버지를 둔 까닭에서인지 반공석방포로의 삶에 대한 집요한 추적을 하고 있다. 차례대로 그의 소설 세 편을 잇달아 살펴보자.

우선 김소진의 단편소설 「쥐잡기」는 앞에서도 언급됐듯이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이자 그의 첫 데뷔작이다. 그런 만큼 그의 문학적 상상력의 뿌리를 이 작품속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볼 수 있다.

김소진의 데뷔작「쥐잡기」에 대해 작가 자신이 말하기를 ‘소설이기에 앞서 애틋했던 아버지께 부치는 제문(祭文)’이라고 한 데서도 짐작되듯이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가미된 이 소설은 주민등록증에 붙어 있던 흑백 증명사진 외는 그 흔한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일 년 전 63세에 폐암으로 돌아간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아들 민홍이 회상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민홍의 아버지는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반공포로 출신이다. 나이 28세 때 ‘앞에 총’이 뭔지도 모른 채 전쟁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되어 부산에서 상륙정에 실려간 곳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였고, 그 안에서 우연히 흰쥐 한 마리를 길들이게 됐는데, 결과적으로 그 흰쥐가 거제도 포로수용소내 폭동의 와중에서 아버지를 죽음의 고비로부터 구해준 적이 있었다.

즉, 하루는 민홍의 아버지가 73수용소에서 워카를 신은 채 노루잠을 자는데, 예의 그 흰쥐가 워커를 갉아먹는 바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게 되자 그 참에 소변이나 보려고 밖으로 나온 직후 좌익계들이 우익계가 잠자는 곳에 돌 세례를 퍼부어 많은 포로들이 처참하게 죽었지만 그 자신은 살아나게 된 일이었다.

그 후 포로교환을 위한 포로 분류 시 남 · 북의 어느 한 곳을 선택하도록 강요되었을 때, 이곳저곳을 왔다갔다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잔뼈가 굵은 고향이 있었고 거기에 살고 있을 부모 처자(아버지는 이미 전쟁 전에 장가를 들었다) 모습이 눈앞에 밟혔”기에 이북 자리로 넘어 갔을 무렵, 마침 그때 아버지의 눈동자에 콘센트 들보 위를 - 폭동의 와중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깨우는 바람에 목숨을 건지게 해준 - 그 흰쥐가 꼬리를 흔들며 이남 쪽으로 걸음을 떼고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남 쪽을 선택해버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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