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담 금수사 주지

얼마 전 공영방송에서 수능시험 날 전국의 유명 사찰과 각 종교기관에서 기도하는 것을 대대적으로 방영된 것을 본 적이 있다.

과연 불공 기도를 하면 좋은 점수를, 고득점을 받고 좋은 학교에 입학 할 수 있을까? 방송에서 어느 학부형과 인터뷰에서 말하길 시험기간에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부처님께 기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과연 그러 할까?

부처님은 모든 현실이 숙명적으로 결정되었다거나(宿命論) 전능한 유일신에 의해 이루어지거나(神意論) 우연으로 이루어진다는(偶然論) 것은 어리석다고 했고 미신이라고 했다.

또한 어느 종교에서도 볼 수가 없는 논리학이 이천년 전 부터 불교에서 고도로 발달해 왔다. 불교의 논리학(因明論)으로는 어떻게 설명할까? 즉 불교는 괴로움을 없애고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 모든 존재나 인과 연의 상관관계에 의해 생겨난다는 연기의 법을 알고 팔정도를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범주를 벗어나면 미신외도가 되는 것이다. 흔히 부처님이나 보살님을 신과 같은 존재로 착각하고 인식해 복을 비는 기복의 문제는 불교 본질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다.

어느 절에 가서 불공기도를 했더니 가피를 입었다는 신도들의 경험담, 기사불와, 인등불사, 방생, 영가전도, 49재 등등의 기복을 승려들이 권장하고 있다.

오늘 불교의 현실이 거의 100% 가까이 복을 벌고 복을 받기위해 절에 다니며 사찰과 승려들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신도들의 길흉화복을 빌어주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사찰의 존립자체가 불가능 할 정도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불교가 흥하고 불교문화가 가장 활발한 때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당,송 때다. 그렇게 찬란한 때에는 삼무일종의 황제가 기복을 위주로 하는 사찰을 헐어버리고 많은 승려들을 환속시켜 군졸로 만들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런 삼무일종의 법난에도 기복을 부정한 선종사찰과 승려들은 왕성하게 활동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어느 성직자든지 흔히 복을 받고 싶어 한다. 개인의 행복만을 위한 기복이 문제이지 이웃과 우리 모두를 위한 것도 장려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직자들의 변명을 위한 자기 논리다. 

위의 예를 든것은 불교의 유루복이라 한다. 유루복 보다는 무루복을 적극 권장한다. 그렇다고 유루복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아니다. 유루복을 짖는 노력을 무루복으로 하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보시를 하라는 것이다.

보시라는 것은 베품을 말한다. 당연히 이웃에게 봉사하고 희생하며 물심양면으로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복을 만드는 일이다. 작복의 차이가 이것이다. 때문에 기복은 미신의 종교행위이고 맹목적이고 맹신적인 믿음의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자 다음으로 자식의 수능일에 부처님에게 불공기도를 하고, 부모가 죽으면 절에서 재를 지내는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불교계에서는  사람의 심리 즉 마음을 8-9단계로 나눈다. 마음의 단계를 알면 왜 재를 지내고 기도를 해야 되는지 알게 된다.

불교에서는 모르고 짖는 행위보다 알고 짖는 행위. 즉 죄가 작다고 한다. 불교의 의식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불공이나 기도, 재를 지내는 것은 자기의 업에 남의 업까지 더한다.

본생경에 돌에 물이 빠질 때 떠오르라고 한다고 해서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무거운 돌이라도 배에 실으면 수천 리의 바다도 건너지 않는가? 벌교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다음 생이 시작될 때 까지 49일이 걸린다고 한다. 49일간의 상태를 바르도라고 한다. 아마 이 바르도의 상태를 마음의 구조로 본다면 ‘심생멸’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근세 심리학의 거장인 칼융박사도 바르도를 인정하고 사람이 죽고 49일간의 불교적인 의식행위를 극찬했다.

보편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탄생과 죽음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윤회에 대한 사실이며 과학적으로도 입증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지각하고 느낄 수 있는 영역은 현실에 지극히 제한적이고 좁은 영역이다. 우리가 못 듣는 소리, 냄새, 맛 그리고 느낄수 있는 의식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그 뒷면에는 무의식의 세계가 광대하게 내재돼 있다.

불교의 교리를 빌리지 않더라도 심리학자인 칼융박사의 말을 빌리면 무의식 세계에는 인간의 모든 과거가 완벽하게 돼 있다고 역설한다. 즉 이것을 불교에서는 여래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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