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시대와 고려시대의 거제
삼한시대와 고려시대의 거제
  • 최대윤 기자
  • 승인 2008.10.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 날 거제는 관광도시, 조선산업의 메카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전해지는 유물이나 역사적 사료가 없어 구전속의 나라로 전해지는 독로국(瀆盧國)을 비롯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유배지로 악명이 높았던 섬으로 불리기까지 거제의 역사는 유구한 세월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에 남겨진 기록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낙동강 서쪽 경상도를 변한이라 하였는데 변한에는 12개의 전제군주가 군림하는 작은 왕국이 있었고 거제는 독로국 또는 두로국이라 불려졌다.

현재는 독로국이 거제라는 설과 부산의 동래지역, 금정지역이라는 설이 있으나 두 곳 모두 독로국의 영역이었고 다만 중심지가 어디였는가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있다.

독로는 개천독과 나라리 벌로의 뜻으로 개천이 바닷가에 접하여 있는 늪에 피어나는 창포과의 여러 해 살이 풀로 잎은 창검같이 뾰족하고 길며 초여름에 황록색 꽃이 밀생하여 단오에 창포를 우려낸 물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거나 건망증의 약으로도 쓰이는 나라리풀의 자생지를 말한다.

거제가 독로 이름을 얻고 최초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변한 12개의 토호국이었던 삼한시대였다. 군장이 있어 제정을 통할하였고, 최초의 소재지는 육지와 인접한 사등면 일대가 가장 유력하다.

거제도는 삼국의 태동이 시작될 무렵 변한지방은 가야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부족 연맹체가 결성되어 신라 백제의 세력에 대응하게 되자 부족사회의 성격을 띠면서 소가야에 속한 금관국(지금의 고성)의 일부가 되었다가 다시 포상 8국 중의 하나인 안라(지금의 함안)에 속하게 되었다.

국가 형태를 갖춘 신라가(법흥왕 39년) 금관가야를 비롯하여 낙동강 일대를 병합하게 되자 거제는 다시 신라에 예속되기에 이른다.

문헌상으로 확실하게 고증할 수 있는 최초의 지명은 문무왕 17년에 거제에 상군을 설치하고 송변현, 노거현, 매진현의 3현을 두면서부터 이다.

독로를 방언으로 두루기와  같다 하여 상군(裳郡)으로 불리었는데 이는 거제도가 넓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이다.

31대 신문왕 5년에는 전국을 9주로 정비하게 되자 거제는 양주(지금의 양산)의 속군이 되었고 35 대 경덕왕 16년에 지방 제도를 개편하면서 비로소 거제(巨濟)라는 명칭을 붙이고 전국 9주 중 양주에 속하는 12군중 1군으로 아주현(지금의 장승포읍 아주리 옛 거로현) 남수현(지금의 율포 또는 연초 옛 송변현) 명진현(지금의 거제면 동부면 :옛 매진리현)으로 개편하였다.

고려 시대에 와서는 강력한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면서 6대 성종조에 이르러 전국을 10도 12주로 개편,거제는 산남도(지금의 경상남도 일부)의 1현으로 기성현으로 개칭하고 지금의 둔덕에다 성을 쌓고 음지를 정 했다.

8대 현종 이후 전국을 5도 양계로 바꾸게 되자 거제는 진주목에 속하는 1현이 되고 지금의 고성군 통영군 대부분의 지역을 통할, 역사 이래 가장 광역의 행정권을 그 권역으로 삼게 되었으며 송변, 아주, 명진 3현의 지명을 그대로 존치하였다.

기성(岐城)은 소백산맥의 지맥이 통영반도를 지나서 견내량의 전하도를 건너 시래산을 이룩하고 남으로 산방산, 가라산으로 뻗었으며 동북으로 국사봉, 대금산으로 길 게 이어져 있고 산세가 세갈래로 나뉘어졌으니 이에 기성현이라 불렀다.

원종 12년에는 왜구의 침탈로 주민들은 실토를 하고 거창군 가조현 또는 진주목 영선현 등에 피난 교거함으로써 거제는 완전 폐현이 되어 고려가 망할 때까지 왜구의 내륙침공의 본거지로 황폐화되었다.

의종 24년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왕을 수행한 문관과 환관들을 살해함으로써 무신정변이 시작되었고 의종은 거제도에 유배되면서 거제는  조선시대 까지 유배지로 역사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 빈번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