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정스님/대한불교 법화종 옥련사 주지

그러나 그들 형제는 먹을 만큼 이상의 양식은 절대로 가져가지 않았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침내 두 형제에 대한 소문은 온 고을로 퍼져 나갔고, 그 소문을 듣고 외삼촌이 찾아와 ‘잠깐만 이라도 좋으니 집으로 들어가자.’고 간청하였다. 그 들이 집에 이르자 때마침 일행선사도 오셨는데, 배도를 보더니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애야, 너 정승이 되겠구나.”
“스님, 언제는 저희 형제더러 빌어먹겠다고 하시더니, 오늘은 어찌 정승이 되겠다고 하십니까? 거짓말 마시오.”
“전날에는 너의 얼굴에 거지 팔자가 가득 붙었더니, 오늘은 정승의 심상이 보이는 구나. 그 동안 무슨 일을 하였느냐?”

배도와 배탁이 그 동안의 일을 자세히 말씀드리자 일행선사는 무릎을 치면서 기뻐하셨다.

“그러면 그렇지! 너희들의 마음가짐이 거지 팔자를 정승 팔자로 바꾸어 놓았구나.”

그 뒤 참으로 배도는 정승이 되었고, 동생 배탁은 대장군의 벼슬을 마다하고 황하강의 뱃사공이 되어 오가는 사람을 건네주며 고매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불자들은 지난 생의 투도죄에 대한 과보를 녹이고 복된 삶을 이루는 방법을 능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불행한 삶을 행복한 삶으로 바꾸는 두 가지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첫째는 현재의 업을 기꺼이 받는 것이오, 둘째는 베풀고 복덕을 쌓으며 사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이상은 업이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업의 결박만 더욱 조여들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윤회와 인과를 철저히 믿고 내가 지은 업을 내가 기꺼이 받겠다는 자세로 살아간다면, 틀림없이 고통을 벗어나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과거에 쌓은 업을 푸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업을 만들게 된다.

바로 이 순간이 맺힌 업을 풀고 푼 업을 더욱 원만하게 회향할 수도 있고, 반대로 새로운 악업을 맺어 더 나쁜 상태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맺느냐? 푸느냐? 이는 오직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상대적인 감정과 자존심으로 해결하려 하면 매듭만 늘어날 뿐이다.

참된 삶, 복된 삶! 그것은 기꺼이 받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 업은 내가 기꺼이 받을 뿐 가까운 사람에게 폐를 기치지 않겠다는 자세로 살았던 배도와 배탁형제의 마음가짐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나아가 배도와 배탁 형제는 자신들의 가난 속에 서도 가난한 이웃을 돕는 선행을 배풀었다.

보시를 하는 그 마음 자체가 바로 도심이요, 우리를 잘 살게 만들어 주는 선공덕이 되기 때문이다. 정녕 이러한 복덕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거늘 어찌 탐욕에 빠져 투도의 죄를 저지르며 살 것인가? 우리 모두 가진 재물로써 능력껏 베풀어 보자. 가진 것을 베풀 때 인색한 마음은 저절로 사라진다.

탐하는 마음과 더불어 인색한 마음이 사라지므로 정신은 맑아지고, 제물로써 남을 살렸으니 마음 가득 환희가 넘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 앞에 그릇되게 뚫려 있던 탐욕의 길, 삿된 길들은 저절로 사라지게 되고, 지옥.아귀 등의 추한 세계도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다.

불자들이여, 부디 잘 명심하기 바란다. 불투도를 계율로 제정한 까닭이 현실의 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능력껏 잘 베풀어, 복덕을 이루는 데 있고 행복한 삶을 이루는데 있다는 것을….

“투도하지 아니하고 복덕을 이루리다.” 가끔씩 마음속으로 염하며 살기를 축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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