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호 창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중’ 부분에서는 누혜의 죽음과 그 동기를 동호의 시선을 통해서 구성하고 있다.

남해의 고도에는 붉은 기와 푸른 기가 다시 바닷바람에 맞서서 휘날리게 되었다. 살기 위하여 그들은 두 깃발 밑에 갈려 서서 피투성이의 몸부림을 쳤다.

철조망 안에서의 이 두 번째 전쟁은 완전히 자기의 전쟁이었다. 순전히 자기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자기의 전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생존의 권리를 포기하는 거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거기(포로수용소)서는 시체에서 팔다리를 뜯어내고 눈을 뽑고, 귀, 코를 도려냈다. 아니면 바위를 쳐서 으깨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서 변소에 갖다 처넣었다.

사상의 이름으로, 계급의 이름으로,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생이 장난감인 줄 안다. 인간을 배추벌레인 줄 안다!

극한적 공포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북에서 내려온 북한군이었던 누혜는 포로수용소 안에서 “수용소가 어수선해졌을 때에도 적기가(赤旗歌)는 부르려 하지 않고 틈만 있으면 누워서 푸른 하늘을 쳐다보기를 좋아했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보여준 용감성으로 최고 훈장을 받은 <인민의 영웅>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타락한!> <반역자!> <인민의 적!> 이런 고함소리가 쏟아지면서 몽둥이가 연달아 그의 어깨로 날아들게 되었다. 

며칠 후 누혜는 “내게는 늙은 어머니가 있소.”라는 말을 내게 남긴 뒤 그는 끝이 안으로 굽어진 철조망 말뚝에 목을 매고 축 늘어져 자살하고 만다.

누혜는 인민의 영웅이었으나 포로수용소에서 반역자로 몰려 그의 시체마저 잔인한 복수가 가해졌고, 나(동호)더러 그의 눈알을 손바닥에 들고 해가 동쪽 바다에서 솟아오를 때까지 서 있으라는 것이 포로수용소내 친공주의자들의 요구였다.

‘하’ 부분에서는 유서를 통해 누혜가 어째서 죽음의 장소로 철조망을 택했는가를 누혜 자신의 목소리로 서술하고 있다. 그의 유서에는 출생에서부터 대학생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아무런 생산이 없는 시인이 된 사연과 그 이후의 인식의 변화과정이 적혀 있었다.

제2차대전이 끝났다. 나는 인민의 벗이 됨으로써 재생하려고 했다. 당에 들어갔다. 당에 들어가보니 인민은 거기에 없고 인민의 적을 죽임으로써 인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만들어내는> 것과 <죽이는> 것. 이어지지 않는 이 간극. 그것은 생의 괴리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십초간>의 간극이었고, 자유에의 길을 막고 있는 벽이었다. 그 벽을 뚫어보기 위하여 나는 내(누혜) 육체를 전쟁에 던졌다. 포로가 되었다.

외로왔다.(……) 그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나는 생활의 새 양식을 찾아냈다. 노예. 새로운 자유인을 나는 노예에서 보았다. 차라리 노예인 것이 자유스러웠다. 부자유를 자유의사로 받아들이는 이 제3노예가 현대의 영웅이라는 인식에 도달했다.

자살은 하나의 시도요, 나의 마지막 기대이다. 거기에서도 나를 보지 못한다면 나의 죽음은 소용없는 것이 될 것이고, 그런 소용없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생이라면 나는 차라리 한시바삐 그 전신(轉身)을 꾀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서력 1951년 9월 X일 기(記)?

이상의 인용들은 누혜가 남긴 유서의 부분들이다. 누혜가 철조망을 자살의 장소로 선택한 것은 ‘세계를 둘로 갈라놓은, 따라서 두 개의 세계를 이어 놓고도 있는 철조망’을 통해 하나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즉 자유를 모색하고 갈구하다가 죽음을 통한 자유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역설적인 운명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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