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현 용주사 스님

어린시절 저희가살던 마을은 열서너집쯤 될듯말듯한 아주 작은 거제도 어느 작은 산골마을. 지금은 수자원공사에서 댐을 건설하는 바람에 마을전체가 수몰되어 버렸습니다만 그 마을 어느날인가 동네어르신이 별세를 하셨습니다.

상여가 준비되고 소리꾼은 상여 앞에서 북망산 찾아갈제 이제가면 언제올꼬. 저희는 그때 그 소리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상주들은 그 상여 뒤를 따라가면서 울음을 웁니다.

그 시절에 저희는 죽음이 무엇이며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삶이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차도. 얼마전 유명배우가 유명을 달리하고 극단적 행동으로 일부사람들을 패닉현상에 들게하면서 생명윤리가 어떻게 이래야만 하는지. 물질만능주의가 빚어낸 산물인가? 아니면….

즈음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자!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아무리 우리가 살려고 발버둥친다해도 언젠가는 우리 모두는 죽게 마련인 인생인 것을 왜 이렇게 아웅다웅하면서, 때에 따라서는 서로를비방하고 험담하고 또는 극심한 경우에는 생명을 빼앗아 가면서.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죽어가고 있는가.

인생의 예지를 가르쳐주고 그 참뜻을 가르쳐준 위대한 철학자, 종교가 치고 그들이 젊었을 때 죽음을 의식하고 그것을 문제로 하여 깊은 사고와 번민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인생의 바른길을 찾아서 남과 함께 인생을 이야기하며 옳은 길을 가도록 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들이 죽음을 의식하고 그것을 심각한문제로 삼은 데에 있었다고 봅니다.

지금부터 약 2,500여년 전 인도 카필라국에서 태어나 29년간 장래 임금이 될 왕자로서 학문과 덕행을 행하였던 석가모니가 홀연히 그런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고행의 길을 택하게 된 것도 역시 이러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번민으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생각되며 6년간의 고행과 수도를 통해서 마침내 다시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수많은 중생을 건지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이 하나의 인간으로서 이처럼 위대한 생애를 마칠 수 있게 된 동기도 바로 그가 죽음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죽음에 대한 의식, 죽음에 대한 문제는 위대한 철학, 위대한 종교, 위대한 생애에 대한 필요적 결과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생의 참다운 뜻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죽음을 의식하고 그것을 심각한 문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무엇보다 먼저 모든 것은 덧없다(無常(무상)) 라고 우리의 의식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불교가 모든 것은 덧없음을 강조하고 있음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렇다고 불교를 염세적인 종교, 비관적 종교 내지는 철학이라고 생각함은 커다란 잘못이며 이는 불교를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덧없는 것은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님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은 아마도 ‘나’ 일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나’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중심이고 세계는 ‘나’ 때문에 있는(緣起연기)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나는 나의 ‘나’만이 아니라 남의 나도 또한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럿이 모여서 대화할 때,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상대의 이야기는 조금은 무시하는 이런 사람이 아니라 나를 내세우지 않은 미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학교교육을 받지 못해도 나를 내세우는 것을 삼가는 사람은 교양을 갖춘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르시길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청정히 하라”하셨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업을 지어 가는가? 인간은 몸과 언어, 생각으로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을 짓습니다. 이를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고 합니다. 즉 신체적인 행위로 인한 업은 신업(身業), 언어로 인한 업은 구업(口業), 정신적인 업은 의업(意業)이라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 이 삼업으로 일을 해서 노동의 대가를 얻고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정신과 행동으로 지은 업은 이 삼업으로 총결됩니다. 이 세 가지 업이 축적되어 에너지를 가진 업력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업의 훈습은 거듭되어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로 만들고 심지어는 당신의 얼굴, 생각마저도 그 업의 훈습에 따라 변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산산조각 낸 지금, 현재 우리사회는  번뇌와 증오, 악설과 망어로 일그러진,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가는 것 같습니다.

불교는 악몽을 꾸는 이 시대를 향하여 무엇을 말하고 어떤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가? 지금 어떤 고급스러운 깨달음이나 현학적인 교학보다도 더욱 간절하게 요청되는 것은 ‘현대인은 어떻게 살고 죽어야 하며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화두를 풀어갈 소박하고도 명료한 행동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의 불교는 불교의 근본자리로 돌아가 ‘잃어버린 차원의 불교’를 창조적으로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잘 닦아서
부처님과 같은 위의를 얻고서는
선법(善法)을 깊이 닦아서 행하는 바가 날로 수승해지며
대승의 가르침을 배워 보살도의 실천자가 되어
몸과 마음에 방일함이 없나니
이와 같은 법을 행한다면 바로 이름하여
보살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유마경』 「보살행품」

2008년 가을햇살이 오후의 산사 창가에 비추입니다. 우리는 살며 생각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삶의 동반자로서 살다가 언젠가 헤어짐이 다가왔을때 아름다운 이별을 하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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