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따라 삼천리 전설의 고향같은 몇가지 이야기를 하여보자

불법 (佛(덧말:불)法(덧말:법)) 즉 부처님의 가르침은 “나” 즉 인간을 떠나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고 인간을 소외하고 무시하는 불법 즉 부처님의 진리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 불법은 지금 여기 현실에 살아 생동하고 숨쉬는 “나”와 “너” 즉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찾을 수 있고 실현 된다는 것이다.

먼 것은 아름답고 가까운 것은 더럽고 추하다는 말이 있다.

계룡산 꼭대기에서 새벽이나 초저녁에 고현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휘황찬란한 불빛이 참 좋아 보이지만 하산하고 나서 고현시가지에 가보면 골목마다 쓰레기요 차량의 매연 술 취한 사람들의 악다구니 소리를 들을 것이다 멀리서 즉 계룡산 꼭대기에서 보는 것과 가까운 시내에서  보는 것은 이렇게 다른 것이다. 이것을 원근미추의 심리라 한다.

이 원근미추의 심리가 불평과 불만, 불안을 낳는다.

남의 밥그릇의 콩이 커 보인다는 말이 있다 즉 남의 밥그릇을 자기와 바꾸어 보아도 남의 것이 커 보인 다는 것이다.

이 심리 때문에 직업을 자주 바꾸고 자기 자식들을 거제 밖의 학교로 유학을 보내지만 반드시 서울 대학교에 가며, 반듯하게 모범적인 학생이 될 수가 없다.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진리가 있다. 미와 추 좋고 나쁨은 바깥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밖의 대상은 스스로 자기 모습을 보이지만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자기 자신일 뿐이다. 내 마음이 아름답고 유쾌하면 밖의 대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내 마음이 음울하고 불쾌하면 밖의 대상이 더럽고 추하게 보일 것이다.

이러하기에 대장경에 “중생이 아프므로 내가 아프다.” 라는 말이 있고 “마음이 아름다우면 온 세상이 아름답다.”고 했고 “마음이 청청하면 온 우주가 청청하다.”고 했다.

중국의 단송 팔대가의 한사람인 “소동파”의 이야기를 하여보자.

소동파는 시로도 유명하지만 “서화”에도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재승박덕이라 벼슬길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없다는 자만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소인에 불과했다. 소동파가 형주라는 고을의 수령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소동파가 어느 날 옥천사를 찾아 갔다. 옥천사의 주지인 승호선사가 “당신의 존함이 어떻게 됩니까?” 라고 묻자 소동파가 “나는 칭(秤(덧말:칭)) 가요” “칭가라니요” 승호 선사가 반문하다 소동파가 안하무인격으로 나는 천하의 고승대덕, 선지식의 무게와 근수를 저울질 하는 사람이라고 거침없이 대답한다.(秤(덧말:칭)이란 거울을 뜻한다)

이렇게 거만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하자 승호선사가 소동파의 귀에 가까이 대고 “악”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자 소동파가 깜짝 놀랐다. 이에 승호선사가 이 “악” 소리의 근수가 몇 근이냐고 묻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근수 즉 무게를 알 수 있다고 칭가라 했지만 그 소리의 무게를 알 수 없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는가.

이 일이 있은 후 “상충”이라는 유명한 스님을 찾아가 무정설법을 청하자 상충스님이 “그대는 어찌 무정설법은 듣지 못하고 유정설법만 들으려고 하느냐” 하고 그를 여지없이 나무랐다.

무정설법이란 산이나 나무, 새소리, 바람소리 같은 부정물이 설법을 한다는 것인데 천하에 자기가 제일 똑똑하고 천하에서 자기가 최고라는 자만심을 가졌지만 무정설법이라는 말에 앞뒤가 캄캄해진 것이다.

어떻게 무정 즉 자연이 설법을 한다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진 것이다. 그 이후에 어느 폭포를 구경하다가 폭포수 소리에 문득 무정설법에 의치를 깨달은 것이다.

이때의 자기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계곡의 물소리는 부처님의 설법에 분명하고 산하의 모습이 바로 부처님의 청정한 법신이라고 노래했다.

즉 자만심이 가득한 소동파도 “아상”과 “아만”을 버리고 나서야 진정한 시인이며 대 자유인이 된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이야기에 담론이 있으면 언제든지 금수사로 찾아와 담론을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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