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용사 주만복 어르신
3대 7명 병역 의무 마쳐 병역 명문가 선정…평생 자랑거리

6.25 참전용사인 주만복 어르신. /사진= 강래선 인턴기자
6.25 참전용사인 주만복 어르신. /사진= 강래선 인턴기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란 없다'는 말이 주는 의미를 곱씹으며 6.25전쟁 참전용사 주만복(91)옹을 자택에서 만났다. 90세의 노인이라고 보기에는 허리 하나 굽지 않은 다부진 모습이 정말 6.25전쟁 참전용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아무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인데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줘 고맙고, 한편으로는 기억이 가물가물해 제대로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막상 질문을 하는 순간 70년이 지난 일을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열변을 토하는 그의 구술에서 전쟁의 참혹함과 망막함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전후 세대에게 전쟁은 TV와 영화에서 본 전투 장면이 고작이지만 직접 경험해본 입장에서 전쟁은 어떤 의미냐고 물어본 기자의 질문에 조금도 주저함 없이 다시는 이 땅에서 생기면 안 된다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주만복 참전용사가 지난해 6월에 받은 병역명문가 증서와 표창장을 자랑하고 있다. /사진= 강래선 인턴기자
주만복 참전용사가 지난해 6월에 받은 병역명문가 증서와 표창장을 자랑하고 있다. /사진= 강래선 인턴기자

주만복옹은 1932년 아주에서 태어나 1950년 8월 거제중학교 4학년 때 친구 6명과 함께 징집 통지서를 받았다. 모두가 한 치의 망설임없이 가덕도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이후 미 3사단 포병대대로 배치됐다.

일본 구주에서 50일 정도 추가 훈련을 받은 후 105m 포병 관측병으로 함경도 신고산 광산지대에 숨어 있는 인민군 토벌 작전, 장진호 지역에 고립된 미 해병사단 구출 작전 등 수많은 전투에서 목숨을 담보로 싸웠다.

그때는 오직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에 전쟁의 명분을 따질 겨를도 없이 인민군을 향해 포를 쏘고 총을 쏘았지만 한 번씩 내가 왜 여기에서 이런 죽을 고생을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고 한다.

특히 그가 죽을 뻔한 1951년 9월 철원 서북방 야월산(487m)고지 점령 전투 하루 전 이유없는 고독과 번민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부상에 대한 암시 같은 것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주만복 어르신을 죽을 고비를 넘긴 야월산 고지 위치(오른쪽 붉은선).
주만복 어르신을 죽을 고비를 넘긴 야월산 고지 위치(오른쪽 붉은선).

그날 오전 6시 야월산 고지 점령을 위해 진격했고 5시간 후인 11시 고지를 점령, 인민군이 만들어 놓은 반공호 정비를 하고 있는데 갑작스러운 적의 박격포 반격이 시작됐다.

교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의 포탄소리가 '슈웅~' 긴 장음이 아닌 '슈~' 단음으로 들리는가 싶더니 옆에 포탄이 푹 박혔다. 같이 있던 4명의 전우 중 본인만 좌측 좌골에 두 개, 좌측 팔에 한 개의 파편이 박히고 가슴에 또 한 개의 파편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가슴을 스쳐 지나간 파편은 일본 구주 훈련 당시 미군 전우에게 선물 받아 안주머니에 간직하고 있던 가죽 지갑이 목숨을 살렸다고 한다.

피 흘리는 자신을 미군 전우가 업고 하산을 하는데 야속한 인민군의 포 공격은 계속돼 옆에서 포탄이 떨어지자 나를 내려놓고 자신들만 몸을 숨기는 등 죽을 고비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술회했다.

그래도 죽을 운명은 아니었는지 무사히 하산해 미군 야전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고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으로 후송, 11일간 입원치료 후 부대로 복귀했다.

군 복무시절 여가시간에 미군 전우와 운동을 하는 주만복 어르신. /사진= 주만복 어르신 제공
군 복무시절 여가시간에 미군 전우와 운동을 하는 주만복 어르신. /사진= 주만복 어르신 제공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든가. 치료 후 포병 관측병에서 통신망 구축 등 직접적인 전투를 하지 않는 병과로 옮겨 더이상 다치지 않고 1955년 1월1일 4년 3개월의 군 생활을 무사히 끝냈다.

그가 겪은 6.25전쟁 참전으로 또렷하게 남는 두 번째 기억은 흥남 철수작전이라고 한다. 1950년 12월24일 흥남항을 떠나 부산항으로 후퇴하는 마지막 배에서 겪은 일은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하루 종일 포성이 울리는 흥남 부두에는 유엔군과 국군의 군수물자를 싣기에도 역부족이었지만 밀물처럼 몰려드는 피난민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 물자를 바다에 붓고 피난민을 태웠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곧 한계에 봉착했고 급기야 수습되지 않은 시신이 바다에 뒹구는 눈 뜨고 차마 볼 수 없는 참혹함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거제시 참전용사유공자회가 지난 2018년 전국우수지회로 선정돼 '호국영웅 위로연' 행사를 열었다. 사진은 당시 모습. /사진= 주만복 어르신 제공
거제시 참전용사유공자회가 지난 2018년 전국우수지회로 선정돼 '호국영웅 위로연' 행사를 열었다. 사진은 당시 모습. /사진= 주만복 어르신 제공

주만복 옹은 "전쟁은 이 땅에서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지금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대해 국제 사회가 힘을 합해 하루빨리 종전시켜야 한다"고 힘줘 역설했다.

그는 또 야월산 고지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전우가 지금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아 자신도 곧 전우들의 뒤를 따르겠지만 가서 만나면 자신의 세 아들과 세 명의 손자 3대 7명이 국방의 의무를 다해 자랑스러운 병역 명문 가문으로 병무청 표창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꼭 자랑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주만복 옹은 "6.25전쟁은 개인적으로 잊을 수도 없는 역사인데 차츰 국가기념일 정도로 그 의미가 퇴색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새로 탄생한 정부가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과 참전용사들이 생활고를 겪지 않고 여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이 확대됐으면 좋겠다"며 작은 소망을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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