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미 태은갤러리 관장

태은갤러리 최은미 관장. /사진= 최대윤 기자
태은갤러리 최은미 관장. /사진= 최대윤 기자

미처 몰랐다. 어느새 봄이 가고 여름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정형화된 일상에 쫓겨 잃어버린 여유를 찾기 위해 잠시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면서 차를 몰았다.

지난 23일 샛바람에 넘실거리는 바다를 끼고 거가대교로 차를 달리다 장목면 관포마을에 들어섰다. 그런데 평소 조용한 어촌 마을이 시끌벅적하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 좁고 아담한 골목길을 지나자 바다를 닮은 집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골목길이 애틋한 사연이 숨어 있을 것 같았다. 겉모습은 조금 투박하지만 천천히 음미할수록 퍽 정겨웠다.

하필이면 애써 알고 찾지 않으면 찾기도 어려운 시골 어촌마을 골목 한구석에 이렇게 공(供)을 들였을까 하는 생각에 대문을 두드렸다. 누구나 품어 안을 것 같은 아담한 집의 주인장인 최은미 관장은 이곳이 아직 오픈 전이지만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갤러리'라고 했다.

태은갤러리 내부 모습. /사진= 최대윤 기자
태은갤러리 내부 모습. /사진= 최대윤 기자

처음에는 작업실 정도로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인테리어 작업으로 새롭게 단장되면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이쁜 공간임을 깨닫고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는 지난 30여년 동안 철저히 아내로 또 어머니로 살아왔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커 성인이 돼 떠나면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여유'라는 것이 생겨버렸단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라는 생각과 '오롯이 나를 위해 살아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오랫동안 미뤄왔던 그림공부를 해보기로 했다.

사실 그의 전공은 국어국문학이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 미술입시 학원을 다니기도 했지만, 미술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책 읽고 글 쓰는 것에 더 흥미가 있다는 생각에 국문과를 선택하고 석사까지 마쳤다.

그러나 그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의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학업보다는 시국과 민주화에 더 많은 애정을 갖고 거리를 나서야 했던 분위기였단다.

그리고 그즈음 서울국립의료원에서 인턴 과정이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면서 인생 2막을 열게 된 것이다.

태은갤러리 최은미 관장. /사진= 최대윤 기자
태은갤러리 최은미 관장. /사진= 최대윤 기자

"감성을 나누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대부분의 아내들은 남편의 근무지에 따라 생활환경을 바꾸게 된다. 하지만 남편의 고향인 거제를 선택하고 추진한 건 그였다.

언젠가 여행했던 거제의 기억도 좋았지만, 아이들이 어릴 때만큼은 자연과 벗하며 성장하길 바라는 인문학도의 고집이 남편을 설득시킨 셈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30여년 만에 생긴 여유를 핑계로 시작한 작업공간을 찾기 위해 거제 곳곳을 돌아다니다 지금의 터를 발견한 그는 한 번에 계약까지 진행했다.

바다가 훤히 보이거나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큰길 주변도 아닌, 그것도 오래돼 매입비용보다 수리비가 곱절이나 들어갈 것 같은 곳이기에 남편의 반대도 만만찮았다.

하지만 굳이 서울에 남겠다는 남편을 설득해 거제에 정착시킨 그의 뚝심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오래된 시골집이 갤러리로 옷을 갈아입는 동안 마을 사람들도 '평범한 시골 마을에 뜬금없이 뭐지?'라고 수군거렸다.

그가 지금의 장소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좁은 돌담길 돌아 집에 들어서자 마주하는 우물이며 작은 마당과 같은 풍경이 어린 시절 어머니 손을 잡고 드나들던 ‘외갓집’의 정서가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 쓰러져가던 시골 빈집은 그가 꿈꾸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헛간은 작업실로 꾸며졌고, 안채는 제1전시실로, 사랑채는 제2전시실로 새로 태어났다. 담장 너머 들려오는 풍경과 파도 소리도 놓치기 싫어서 제1전시실 지붕엔 바다가 보이는 조그만 테라스도 만들었다.

완성되고 나니 작업실로만 쓰기 너무 아까운 나머지 고심 끝에 갤러리를 열기로 했다. 그리고 갤러리를 열겠다고 말하자 이번엔 남편이 더 적극적이었다.

남편은 거제 사람에게 받은 게 너무 많은데 이왕이면 거제시민에게 조금이나마 봉사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갤러리의 이름은 남편과 그의 이름을 사이좋게 한자씩 붙여 '태은갤러리'라고 지었다.

태은갤러리. /사진= 최대윤 기자
태은갤러리. /사진= 최대윤 기자

자꾸 봐야 이쁘다 그림도 그렇다

그는 태은갤러리를 많은 사람과 공감하는 갤러리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우선은 그림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보다 사람들과 편안하게 좋은 작품을 공감하는 일부터 시작할 생각이다.

미술을 어려워하는 시민을 위해 전시 때마다 기본적으로 작품명이나 작품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 제공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는 그림 감상법은 구구절절한 설명보다는 보는 사람의 느낌과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주의다.

오히려 오랜 내공이 쌓인 작가의 그림을 한눈에 모두 이해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작품은 볼 때마다 다양한 메시지를 느낄 수 있기에 좋은 작품은 여러 번 감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특히 그는 훌륭한 작품이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갤러리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태은갤러리는 앞으로 작품이 전시될 때마다 작가의 작품에 맞게 조명·동선·배경·소품·구도를 생각해 작품의 개성을 최대한 살리는 전시를 고민할 계획이다.

갤러리를 운영하겠다는 결심부터 수입보다는 그림을 볼 수 있는 여유와 눈을 공감하고 싶다는 그의 생각은 태은갤러리의 개관 특별 초대전으로 이어졌다.

그가 기획한 이번 초대전의 주인공은 간결한 형태미와 추상적인 작품으로 작가의 회화적인 이상을 설정하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다양한 조형적인 모색을 꿈꾸는 화가로 정평이 나 있는 김한오 화백이다.

그는 김 화백의 작품은 수준 높은 작품이면서도 미술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나 도슨트가 없어도 누구나 공감하고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작품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이번 특별 초대전을 위해 김 화백과 제자들을 갤러리로 직접 초대해 설득하는 등 적잖은 공을 들였다.

최은미 관장은 "김한오 화백의 작품은 거제시민들에게 친근한 문화예술 공간을 제공하고 수준 높은 작품으로 지역민들에게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획한 만큼 많은 시민들이 방문하셔서 예술로 공감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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