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신 전 거제시의회 의장

“누가 사는 곳을 묻는다면 시골에서 20리를 더 들어가면 나오는 촌에 산다고 대답합니다. 아직도 오지개발사업비를 받는 지역입니다.”

이영신 전 거제시의회 의장은 남부면 오지 어촌마을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어부로서, 때로는 거제시민의 대표로 거제지역의 남다른 애향심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남부면 저구리에서 태어난 이 전 의장은 명사초등학교와 통영동중을 졸업하고 통영제일고(구 통영상고)를 졸업한 뒤 양식업을 시작했다. 당시 거제에는 조선산업이 들어오기 전으로 거제지역에서 고수익을 올리기 위해 양식사업이 적합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전 의장은 당시 국내 최초로 가두리 복어양식을 성공해 국내 복어양식의 시초가 됐고, 양식 복어는 일본수출로 이어지면서 경상남도 수출탑을 수상하기도 했다.

비록 어촌의 어부지만 애향심이 남달랐던 그는 거제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지난 95년 2대 거제시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도전한 3대 거제시의원 선거에서 당선, 4대 거제시의회에서는 의장에 선출돼 거제시와 의회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해 뛰었고 경남 시·군의회 의장협의회장과 전국 시·군부의회협의회 상임부회장을 맡기도 했었다.

그는 “평의원으로 있으면서 거제시의 크고 작은 문제점과 발전 가능성을 검토하며 4대 의회에서 자신이 생각 했던 의정을 추진 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4대 거제시의회가 구성되면서 이 전 의장은 (주)덕산의 기부체납과 삼성호텔의 건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위를 구성, 성사시키는 일을 첫 사업으로 의정활동을 시작했다.

2004년 거가대교의 침매터널 제작장이 안정공단으로 넘어가려던 것을 지금의 오비지구로 확정짓기 위해 발로 뛰는 의정을 펼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이 전 의장.

당시 환경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료의원들과 함께 서울에 있는 대우건설 본사를 두 차례나 방문, 본사 사장을 만나면서 침매터널 건설현장의 거제유치를 이끌어 냈고 결국 제작장도 안정공단으로 갔다.

또 의정활동의 투명성과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CCTV로 회의 내용을 녹화, 일반시민도 쉽게 의회 회의를 볼 수 있게 함으로써 공무원들의 성의 있는 답변을 이끌어 내며 거제시의 시정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 전의장은 “이런 일들을 성사 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4대 시의회 동료 의원들 남다른 열정으로 이뤄낸 의정활동에서 비롯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전 의장은 거가대교의 기공식과 준비과정에 있어서 남다른 열정을 보여 의정활동을 마친 지금도 거가대교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지난 2003년 11월 27일 열린 거가대교 기공식에서의 일은 그의 기억 속에 특별한 감흥으로 남아있다.
당시 기공식을 앞두고 거가대교의 명칭에 대해 거제시와 부산시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거제시는 ‘거가대교’, 부산시는 ‘부산거제 연결도로’로 불렀기 때문이다.

이 전 의장은 “거가대교의 기공식에 거제시 대표로 참석하면서 훗날 거가대교의 명칭문제가 불거질 것을 우려해 기공식 전날 김혁규 전 경남도지사를 만나 기공식 때 거가대교라는 명칭을 확실히 할 것을 당부 했지만 부산 신항만에서 치러진 기공식에서 ‘부산거제 연결도로 기공식’으로 명칭이 정해졌다”며 “앞으로 거가대교의 명칭을 확실히 정해놓지 않으면 더 큰 문제가 발생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기회가 된다면 훗날 자신이 보관하고 있는 3·4대 거제시의회 회의록을 정리해 당시 에피소드와 함께 책을 엮어 볼 생각이라는 이 전 의장은 평생 업으로 삼던 가두리 양식장사업의 규모를 점차 줄이고 현재 자신이 운영 중인 일식집을 거제 최고의 일식집으로 키우는 것이 목표다.

그는 “거제가 고향이고 거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토록 열정적으로 일 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앞으로 내가 거제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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