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조 서울 동대문구-외포출신

너는 몽땅 체에 담아 걸러서 찌꺼기를 버리고 마신다하여 막걸리인가? 너는 막 마실 때 걸러서 마신다하여 막걸리인가?

우랄산맥, 알타이산맥 동북 광활한 지역에서의 채집과 유목생활에서는 막걸리 너는 필요 없었는지 몰라!

그 옛날 한반도에 정착, 농경사회의 곡식의 여유, 목마른 농부에게 수분을, 허기진 배에 영양을, 피곤을 덜어주는 흥분을, 다 해결하는 농부의 동반자 그 이름도 유명한 막걸리탄생. 농부의 능률적이고 부단의 육체 노동을 위한 에너지 공급원 막걸리, 너를 탄생시킨 우리조상 참 현명하고 위대했다.

너는 대통령부터 농부까지 진로소주처럼 온 국민이 좋아하고, 한 차원 높은 한민족의 생활의 표상인 아리랑 필터담배를 좋아하듯, 사회주의 독재국가에서처럼 평등한 통용을 강제하지도 아니했는데 너는 단군할아버지때부터 생활 속에서 자연히 온 국민의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온 국민이 모두 너를 좋아한다. 그래서 너는 우리 집이고, 고향 외포리이고, 조국 대한민국이다. 우리 아버지는 평생 너를 마시며 농사일 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1주일에 한번 너를 담그고, 아침 낮 저녁에 짜서 아버지의 필요한 수분과 영양을 공급했다.

우리 집 여동생들은 아버지 막걸리 짜서 맛보느라 술 잘 마신다. 들 논밭에 막걸리 병을 아버지에게 나르느라 나도 뛰었다. 그래서 너는 우리 집이고,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우리 여동생, 나도 된다.

1960년대 서울시내 번화가는 대포 집(막걸리 집)이 차지했다. 나는 그 시절 무교동 대포집에서 친구 선배와 너를 한없이 마셨다.

4·19 날 학생데모대 따라다니느라 목이 말라 친구와 무교동 대포집에서 목을 적셨다. 마시다가 공짜로 한 주전자 얻어 마신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고향집 논, 밭에서 일하다가 고랑 물에 담가둔 막걸리 한 사발을 한숨에 마신다.

무교동 대포집에서 한 사발 마시는데 5분 이상 걸리는데, 고향 논밭에서는 1분도 되기 전에 잔이 비네!

너는 서울 대도시에서나, 거제도 농·어촌에서나 나의 위대한 동반자였다.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요사이 가게서 파는 서울 쌀막걸리를 볼 적마다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을 생각한다. 오늘같은 초여름 더워지는 오후는 네가 생각나서 혼자서도 고향집 생각하며 한 병 맛있게 마신다. 일정시절은 법으로 금지함에 몰래 주조하고 숨겨야 했다.

그때는 농부들이 막걸리를 집에서 자급하는 위대한 양식이었다. 1945년 8월15일, 조국해방의 날은 우리고장 막걸리 해방의 날이기도 했다.

우리고장 젊은이들은 보리쌀 막걸리를 집집마다 담아 하루는 이 집, 다음은 저 집, 한 달이고두 달이고 막걸리를 마시고 춤추며 노래하며 해방을 노래했다.

막걸리야 너는 우리 고향집이고, 우리고향 외포리이고, 우리조국 대한민국이다. 나는 너를 참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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