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산문-장원>

▲<고등부-산문-장원>

편 지

거제중앙고등학교 2-1 최 주 연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부터 아버지의 해외출장은 부쩍 늘었다. 한번 출국하면 기본적으로 몇 달씩이나 집을 비우게 되는 장기출장이어서 우리 삼남매는 어머니의 단독 지휘 아래서도 거뜬히 자기 일을 해낼 정도가 되었다.

그렇지만 집안의 가장이신 아버지의 부재는 수레바퀴 한 짝이 달아난 것처럼 늘 허전하고 답답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를 들뜨게 한 것은 이따금 아버지가 해외에서 부친 편지와 소포꾸러미였다.

나는 편지를 읽을 때마다 아버지의 필체를 유심히 보았다.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공간이 다를 뿐, 아버지의 필체는 한결 같았다. 가늘어 보이면서도 날렵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돌려 읽으며 소포를 뜯었다. 그 안에서 인도의 풍경사진이 나오는가 하면, 영국의 사진이 나오기도 했다. 이것은 모두 아버지가 직접 찍으신 사진들과 현지에서 구입한 엽서들이었다.

물론 우리 가족이 처음부터 아버지로부터의 편지를 받아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 아버지께서는 전자우편을 보내셨지만, 직장에 다니시느라 밤늦게 귀가하시는 어머니와 어둑해진 뒤에야 귀가하는 내가 전자우편 확인을 깜빡 잊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차츰 아버지의 소식들은 뒤로 밀리게 되고 한꺼번에 읽는 일이 많아져, 결국 우리 가족은 그 대안책으로 아버지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언뜻 보면 느려보일지도 모르지만, 전자우편의 속도를 능가할 정도로 편지는 아버지와의 소통을 빠르게 했다.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받는 일이 차츰 익숙해지자, 나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다. 바로 우체국에 들르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좋아하는 우표를 사기 위해 간혹 들어갔었지만 요즘은 편지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편지 쓰는 사람이 줄어서인지 동네 우체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에 직접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치곤 한다. 나보다 먼저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사촌언니, 다른 곳으로 전학 간 친구 그리고 제주도에 있는 친척언니 등과도 편지교류를 한다.

이렇듯 편지는 전자우편과는 사뭇 다른 매력이 있다. 다정다감하면서 반짝인다. 편한 것, 쉬운 것, 빠른 것에 익숙해진 요즘 사람들은 의외로 편지쓰기를 주저하곤 한다. 그래서 자연히 어버이날이나 스승의 날에 감사의 편지 쓸 때, 딱히 쓸 말이 생각나지 않아 난처할 때가 많다. 손으로 카드 몇 장 쓰는 것조차 귀찮아서 기계를 통해 한꺼번에 찍어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가 보내주신 편지를 보면서 늘 감사를 드린다. 아버지와 편지 주고받는 습관이 들지 않았다면, 모의고사나 내신 성적표 부칠 때를 제와하고는 편지봉투를 대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로부터 편지를 받았을 때, 내 손에 들린 편지지에는 보낸 이의 사각거림, 속살거림 등이 깊이 배어있을 것이다. 보낸 이의 연필 잡은 , 펜대 잡은 손은 위에서부터 사각사각 서걱서걱 전하고픈 그 마음을 써내려갔을 것이다. 똑같은 간격으로 자로 잰 듯 딱딱 배열된 전자우편보다는 편지의 비뚤이진 글씬 반 획, 잉크 펜 번진 자국 그리고 오랫동안 고심하다 지워버린 흔적을 나는 더 좋아한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아날로그적인 것에 더 마음이 가는 것처럼 말이다.

편지지 위에는 저마다 다른 사연, 아야기들로 아롱져있다.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 누군가로부터 따스함이 포개진 편지 한 통을 받았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가벼운 이야기든, 웅숭깊은 이야기든 사람들이 저마다 종이 위로 다른 글씨로 옮겨갈 때, 옮겨서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고백할 때, 고백해서 함께 느끼고 나눌 때에 우리 사회는 더욱 따뜻한 사회가 될 것이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