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광 칼럼위원
김미광 칼럼위원

몇해 전 무척 따뜻했던 겨울이 있었다. 기상 예보에서는 그해 유난히 따뜻한 것은 지구온난화 영향이라고 했다. 봄날 같은 겨울은 계속됐고 좀처럼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거제도의 따신 겨울이 좋았다. 추우면 입을 거라고 내놨던 두터운 겨울 털 코트들은 아예 햇빛 구경을 못하고 다시 옷장으로 들어갈 판이었다. 

마당을 내다보니 꽃밭은 더 난리였다. 예상치 못한 1월의 따뜻한 겨울바람에 늦가을 꽃밭에 심어 뒀던 구근들이 앞다퉈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잡초까지 무성하게 땅바닥에 딱 붙어서 자라는 것이 아닌가. 겨울이 추워야 여름에 농사도 잘 되고 해충이 적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내가 농사짓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건 그냥 지나가는 소리에 불과했다.

원래 거제에는 엄동설한은 잘 없지만 그 해는 유난히 전국적으로도 특별한 한파 예보가 없이 온화한 겨울로 지나가는 것 같았다.

우리 집 봄의 시작은 크로커스부터다. 항상 노란 줄무늬를 가진 보랏빛 크로커스가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면서 다른 꽃들이 앞다퉈 봄을 맞이하러 나왔다. 그런데 그 따뜻했던 겨울을 지낸 봄에는 여기저기 많이 심었던 크로커스가 몇개 올라오지 않았다. 게다가 생명력과 재생산의 여왕인 수선화마저도 꽃대가 많이 올라오지 않았고 화려함의 극치를 이뤘던 튤립은 꽃잎이 기형인 꽃들도 많았다.

영하로 내려가는 혹독한 겨울을 겪어야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구근들이 추운 겨울을 겪지 않아서 일어나는 현상중의 하나라고 했다. 추위를 겪지 않았으니 꽃눈 형성도 늦고 줄기 성장도 더디며 꽃 색깔도 화려하지 않았다.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속살의 구근들이 땅속에서 어떻게 추위를 이겨내고 어떤 작용으로 꽃눈을 틔우는지 모르고 양파와 비슷한 재질의 어디에 생명력과 관련된 것이 있는지 모른다. 한 가지 명확한 것이 있다면 그들 속에 프로그램화된 어떤 명령이 있어 특정한 낮은 온도에서 더 강인하게 살아남아 봄에 뿌리를 내리고 꽃이 피도록 한다는 것이다.

옛날 북유럽 바이킹들은 숲 한가운데서 햇빛을 많이 받고 바람도 없이 자란 나무로 배를 만들지 않고 바닷가에서 찬바람과 모진 추위를 견뎌낸 나무를 사용해 배를 만들었다고 한다. 바다의 차가운 강풍과 냉기를 이겨낸 나무로 만든 배라야 거친 바다의 항해와 모진 풍랑에도 부서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삶에서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도 없이 평탄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어보지 않은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진심어린 위로와 조언을 해 줄 수 없을 것이다.

고통은 사람을 더 강하게 하고 성숙하게 한다. 어려움을 겪는 그 당시에는 말할 수 없이 괴롭고 힘들고 때로 포기하고 싶어지지만 고비만 넘기면 한층 업그레이드 된 삶의 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지혜를 갖게 된다.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모진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살아온 사람은 뭔가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이해하는 폭과 깊이가 다르고 그들에게는 남다른 삶의 지혜가 있다.

냉혹한 겨울이 식물까지도 강하게 하고 새 봄에 더 아름다운 꽃으로 피워나게 하는데 하물며 삶의 고뇌를 겪은 사람이랴.

올해 거제의 겨울이 유난히 춥다. 영하 10도까지 내려갈 것이라고 하고, 8일 아침에는 마당에 나가니 모든 것이 얼어 있었다. 춥긴 춥나보다. 엄동설한을 겪어낸 구근들이 올 봄에 얼마나 화려함을 자랑할까 기대가 되니 요즘 같은 영하의 엄동설한도 그리 싫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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