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머뭇거린다는 것
11월, 머뭇거린다는 것
  • 김계수 칼럼위원
  • 승인 2020.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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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수 칼럼위원
김계수 칼럼위원

모든 사람이 세상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 처해 있는 사정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다녀간 인연 중에는 봄꽃처럼 하얀 인연도 있었고, 여름처럼 활기찬 인연도 있었을 것이다. 가을 산국화처럼 깊고 융숭한 인연도 있었을 테니 한 해의 끝에서 세상을 되새김하는 모습은 서로 다르다.

철새들이 따뜻한 곳을 찾아 살아온 터를 떠날 때, 텃새들은 조용히 비워진 숲 사이에 햇살을 쪼아 온기를 모은다. 물드는 산을 바라보면서 아슬아슬한 가지 끝에서 우는 가을의 애달픔을 오롯이 전해주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한 해가 다 가는 마당에 잔치하나 펼칠 일 없어 한탄하는 사람도 있다. 시절이 힘들어도 사랑하는 일에 몰두한 청춘들이 아름답지만, 역병으로 밤거리 반짝거림도 제한을 받게 된 불빛보다 더 초라한 뒷배경들은 쓸쓸하다.

거침없이 흐르던 냇물의 양이 서서히 줄어들고 속도마저 잃게 되면 물속 생명은 진흙 깊숙이 파고들며 체온을 유지한다. 갈대 뿌리도 진흙 속으로 낮게 가라앉고 나무의 이끼는 마르기를 지체하지 않는다. 기고만장하던 하늘도 내려앉았고, 부풀었던 숲이 무게를 던져내는 11월은 일 년 중 머뭇거림이 허용되는 한 달이다.

이제 곧 겨울이 시작되고 가을은 아직 가지 않았다. 어떤 모습과 마음으로 겨울 강물 속으로 뛰어들지 매무새를 다듬어야 할 시기다. 견뎌 온 봄, 여름, 가을의 배경들을 어떻게 잘 포장을 해서 간직해야 할지를 11월 중에 결정해야 한다. 코로나 감염병으로 시작된 한 해가 어수선하고 정신없이 흘렀고 마치 좀비 영화 속에 사는 일상처럼 주변 사람을 견뎌내야 했다. 하도 사건과 탈이 많은 시절이라 정리할 겨를이 있겠냐만, 단 한 번도 허둥대지 않았던 자연을 보면서 결국 버텨내야 할 인간의 운명이다.

가을이라 해도 벌레 우는 소리 제대로 듣지 못했고, 버스를 타고 일행을 이루어 멀리 꽃구경 한 번 다니지 못했으니 잠시 머물러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하다. 봄에서부터 가을까지 밀려온 시간이 머뭇거릴 수 있고, 12월부터 봄까지 추위를 견디게 할 힘을 충전할 수 있는 한 해의 정거장 같은 11월.

가득 찬 들판이 비워지고 잎 떨어진 나무가 등뼈를 드러내면 갑자기 우울해지거나 까닭 없이 슬퍼지는 11월, 불안과 외로움을 견딘 수고한 자신을 위해 11월에는 잠시 머뭇거림을 허용해야겠다.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자신을 위해 불안의 계절을 잠시 잊고 연기하듯 걸어보자. 운동하듯 양팔을 높이 들고 큰 보폭으로 걸어서는 안 된다. 연기하듯 천천히 한껏 멋을 내며 고독에 빠진 사람처럼 폼나게 걷자. 지난 인연들이 생각 위에 포개지기도 하고 어긋난 기억들로 다시 감정이 상해지는 순간이 올지라도 걸어서 생각을 다듬어보자.

걷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게 하는 사건과 사람이 있으면 골똘히 생각하자. 생각하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과 같다고 말하지 않던가. 그러면 포개지고 엇갈린 인연들이 바로 놓이어 단정해질 수 있으리라. 아예 버리든지 고쳐서 이어가든지 해야지 거친 인연 힘겹게 짊어질 이유 가지지 말자. 한 사람의 반듯한 인연 때문에 살아갈 힘이 생기기도 하니 말이다.

머뭇거림은 짧아야 한다. 길어지면 멋있어 보이던 고독은 내면을 파고들어 두려움을 낳고 우울증을 앓게 된다. 가지에서 떨어진 나뭇잎이 바닥에 뒹구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고독과 우울은 외면상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고독을 짧고 멋있게 연기하지 않으면 변종 우울증은 추위와 어둠에 강해 감기처럼 공격할 것이다. 힘겹게 버틴 세월을 다독이기는커녕 12월을 시작도 하기 전에 마음이 움츠러들 것이다.

머뭇거림은 자신에게 주는 선물 같은 시간이어야 한다.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 궁금할 때, 관계가 힘겨울 때, 마구 흐르는 세월이 아쉬울 때, 그래서 마음이 우울할 때 스스로 세상 속을 오래 들여다보는 것, 바로 머뭇거림이다. 자신의 내면을 거울처럼 가만히 바라보면 살아 온 흔적이 보인다. 생각하며 바라본다는 것은 살면서 입은 내 상처에 스스로 연고를 발라주는 일이다.

11월, 고독의 연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내 안의 상처를 보며 머뭇거리는 것, 순수한 나를 가꾸는 일이다. 긴 겨울을 견디기 위한 충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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