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등교시간이 되면 제일 두려운 게 교문 앞에 서 있는 규율부 형님들이다. 눈에 걸리는 후배를 불러 세워놓고 모자부터 운동화까지 스캔하고는 규정에 벗어난 부분이 있으면 그것을 빌미로 엎드려뻗쳐를 당하거나, 교문 옆에 세워 놓고 망신을 준다. 대개의 규율 부원들은 몸집이 좋고 싸움도 잘하는 소위 주먹들이다. 그러니 교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아무 잘못도 없으면서 심장은 뛰고 숨은 멈출 것 같고 규율부 형님이 '너, 이리와' 하고 부르면 다리가 후들거렸다.

선도부들은 노란 바탕에 고딕의 검은 글씨체로 '규율'이라고 쓴 완장(腕章)을 찼다. 무서운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그 완장이었다. 그 완장을 누가 차던 완장만 차고 있으면 두려움의 존재가 됐다. 완장의 힘은 대단했다.

암울한 역사를 모티브로 권력을 완장으로 풍자한 윤흥길의 대표작 '완장'은 한국인의 권력의식을 적나라하게 함축한 알레고리적 소설로, 1983년 초판이 1993년에는 제2판을 발행할 만큼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동네 건달인 '종술'은 저수지 관리인이라는 완장을 찬 뒤 안하무인이 된다는 단순한 이야기지만 그 속에 담고 있는 함의는 '권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문제제기와 성찰이었다.

사람들은 완장만 차면 '갑'이 된다. '갑이 되면' '갑질'을 한다. 완장을 찬다는 것은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것이고,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것은 책임도 함께 져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완장만 차면 권한은 권력이 되고, 책임은 자기합리화 된다. 완장은 감투의 동의어가 되고 말았다.

완장을 차면 조직사회가 원만하게 돌아가도록 막히면 뚫어주고, 부족하면 채워주고, 빗나가면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완장이라는 한자가 재미있다. 완(脘)은 '밥통 완'이다. 장(章)은 '글'을 말한다. 참 절묘한 글자의 조합이다. 글이 좀 되는 사람(章)에게 완장을 채웠더니 밥통(脘)짓만 한다는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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